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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事

사천왕2

2005/11/12

 작업을 하든 안하든 일단 조계종과의 미팅은 약속된 것이니 작품기획안을 작성해야 했다. 첫번째 안은 여러장의 철판에 형상을 투각해서 입체적으로 겹쳐지게 하는 방식인데 그날 최관장님의 드로잉을 정리한 것이다.  두번째는 작은 깍두기모양의 철조각을 낱개의 픽셀단위로 높낮이를 각각 다르게 배열하는 모자이크식 부조다. 이건 조각가 노주환선생의 금속활자조각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단조된 철판조각이 서로 맞닿으면서 생기는 틈이 선으로 표현되는 방식인데 이것은 내가 윤기씨 작업실 시멘트바닥의 균열을 보다가 떠올린 아이디어다. 컴퓨터 앞에서 서류를 꾸미면서 각각의 안에 '투각 다중판 설치'니 '점단위 구성부조'니 제목을 붙여놨더니 꽤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사실은 디자인과 기법이 추상적으로 얼버무려지진 형식적인 서류일 뿐이다. 저녁부터 부랴부랴 A4사이즈의 6t의철판을 산소로 자르고 두들겨서 세번째 안의 샘플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구상한 3안으로 일을 몰아가야겠다란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작업의 주체인 내 입장에서 편한방식을 전제로 했을때 탈이 안생길 테니까. 아무튼 이 샘플 역시 두 시간 여만에 뚝딱 만든 급조물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딱딱하게 읽히는 서류에 비하면 그 무게만큼이나 구체적인 힘이 있다.




 2005/11/13

 내가 준비해간 샘플을 본 최관장님은 무척 반가운 목소리로 좋다고 하셨고 우린 곧바로 박물관팀을 찾아갔다. 30여분 만에 각 안에 대한 나의 설명이 끝났고 찻잔이 모두 비워졌다. 그리고 내가 만든 세번째 안의 샘플이 둥근 회의테이블위에서 확정안으로 살아 남았다. 종이로 만든 서류는 바로 덮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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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4 직지사 후불탱 동방지국 초

박물관 추진팀 심주완 주임이 제공해 준 전국 사찰미술자료를 몇 칠 동안 검토했다. 그들 중 조형미와 비례감, 먹선의 아름다움이  단연 돋보이는 직지사 후불탱의 사천왕상 탱화초를 모본으로 결정했다. 용인대 복원팀이 네 상 중 유실된 두 상의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일정을 맞춰 기다리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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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8  모델링 작업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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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작품설치 계약을 하자는 조계종 박물관 추진팀의 전화를 받고 생각해보니 샘플링을 한지도 벌써 일 년이 넘게 흘렀다. 사무실에서 작품설치 계약서를 작성하고 작품이 설치될 빈 공간을 살펴보면서 완전한 백지상태에서 오는 긴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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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 

 직지사 천왕문에서 5미터가 넘는 사천왕을 대하고 잠시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대웅전에 들어서자 드디어 삼세불회탱을 볼 수 있었다. 법당 안은 채광이 어두운 편이라 어차피 조명장비 없이 촬영하기에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도판에서의 느낌보다 작다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역시 다른 사천왕에 비해 비례와 균형감이 뛰어나다. 하지만 정작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선'. 내가 기대했던 선은 정작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사진을 찍어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일 일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근접촬영 하고자 했던 수 천 가닥의 현란한 선들은 짙은 채색과 세월에 모두 덮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도상의 기운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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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낮에 용문사에서 천왕목의 기운을 느끼고 돌아왔다. 1대1 드로잉을 위한 장소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기세의 다락방으로 결정했다. 실사출력 된 현수막원단을 바닥에 펼쳐놓으니 방안이 가득 찼다. 관건은 화면 안에 까마득하게 엉켜있는 선들 중에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따로따로 추출해 내는 일이다. 문제는 탱화초가 없는 다문천왕과 증장천왕이다. 보이는 색 면의 경계를 근거로 하되, 지국, 광목천왕에서 보이는 힘있고 현란한 탱화의 철선을 유추해서 새로 만들어 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레이저로 컷팅가능한 한계 치수를 고려해야 된다. 이것은 사용 가능한 선을 모두 추려내고 수정액으로 줄여가는 방식으로 하면 될 것 같다. 보일러가 약하게 돌아가는 방바닥 위에 얇은 트레이싱지 아래로 쌀알만큼 확대된 인쇄망점을 더듬어가면서 빨간색 매직으로 선을 그어 나갔다. 손과 발에 땀이 났고 트레이싱지에 쩍쩍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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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이 방에서 꼬박 3일이 지났다.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내가 불안해 지는 이유는 여전히 멍한 정신상태로 선을 긋고 있는 불쾌한 느낌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문, 증장천왕의 패턴에 감을 잡았다는 사실이지만 진도는 여전히 더디다. 하나의 선을 그을 때마다 수 십 개씩 생겨나는 면은 고스란히 날카로운 쇳조각이 되어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최대한 생략하는데도 엄청나게 많은 면으로 쪼개지는 것에 당황스럽다. 한번 꼬이게 되면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특성상 부분의 오류를 매 순간 체크해야만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지금 우선 중요한 건 지도 전체를 보는 넓은 시야. 산맥의 줄기를 읽고 강의 흐름을 파악해야 될 시점인데 지방 어느 마을에 감금된 느낌이다. 오늘도 불확실하게 잘려진 쇳조각들이 방안 가득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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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바닥에 깔려있던 도상들을 걷어 이불처럼 개고 나니까 기분이 후련하다. 오늘 부로 일단 드로잉작업을 완료한다. 몇 칠 동안 답답한 방바닥에 엎드려 지내느라 지친 것도 사실이지만 계획대로 시간을 쓰기 위해서는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실물 크기인 만큼 세심한 부분까지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램은 포기한지 오래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그은 선들은 거의 직관에 의해 그어진 것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컴퓨터로 작업을 해야 된다. 지금 찜찜한 부분들은 컴퓨터 상에서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내일부턴 최소한 엎드려있지 않아도 된다. 트레이싱페이퍼 4장을 A4크기로 모두 잘라서 스캐닝을 하는 데만 6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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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내 다 들어 주마. 내 다 들어 주마. 피 토하고 우는 사연 내 다 들어 주리니. 북방천왕은 비파를 끌어안고 고요히 미소를 머금는다. 비파소리와 중생의 눈물 흐르는 소리에 눈빛을 반쯤 잠그고...]
 문장의 힘을 느낀다. 이 짧은 글속에 다문천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니... 장모님께서 권해주신 최명희 소설 '혼불'을 읽고 며칠간 고민했던 중요한 부분이 해결됐다. 다른 사천왕과 확연히 차별되는 다문천왕의 눈매는 은근히 부담되는 걸림돌 이었다. 동,서, 남방 천왕은 워낙 눈을 부릅뜨고 있어 비교적 인상을 수월하게 뽑아 낼 수 있지만 북방천왕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인상이라 눈 폭이 세로10미리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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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23:41 일러스트레이터

 때가 빠진 내 손톱을 보는 게 몇 년 만인가 싶다. 목리작업실로 왔지만 줄 곳 앉아서 지낸다. 컴퓨터작업이 육체노동에 비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마우스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선 몇 번 씩이나 쥐가 났고 정말이지 컴퓨터 앞에서 멀미를 하고 있다. 아까 낮에는 향숙이한테 도와 줄 수 있겠냐는 전화를 했지만 결국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컴퓨터가 서툴어 속도가 느리지만 어쨌든 내가 스스로 판단해야만 본 작업에 합리적인 조각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는데도 온몸이 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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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작품이 설치될 현장의 여건을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현장에서 심주완 주임, 김흥식 전문위원, 공사감독관님과 설치방법을 의논하던 중 갑자기 다른 이미지가 떠올라 설치방법을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현장은 천정이 낮은 편인데 기존 계획대로 벽면에 액자처럼 설치할 경우 아무래도 무게감이 반감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현장소장은 안전상 문제점과 벽면자재를 추가로 구입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점점 더 구체적인 이미지가 완성되고 있었다. 마침 상부 골조공사가 진행 중이라 사전 보강을 하게 되면 구조적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다. 깐깐한 현장소장을 20여분간 설득했고 결국 합의를 했다.  몇 달 후 바닥과 천정을 찌르며 공간에 직립한 사천왕상이 머릿속에서 뚜렸하다. 오늘 때맞춰 현장에 들른 것은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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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컴퓨터작업이 모두 끝났다.  무려 20일간 컴맹인 내가 더듬더듬 완성한 결과물이 레이저공장으로 넘어갔다. 김기주 대리는 앞으로 일 주일 이상 데이타를 손보느라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일단 내 손을 떠났으니 후련하다. 오늘 이 기분은 마치 설치를 끝낸 듯한 기분이다. 내일은 우선 발주한 다문천왕부터 순차적으로 도착한다. 드디어 철이다. 그것은 종이처럼 무기력하지 않으며 프로그램처럼 막연한 재료가 아니다. 자신 있다.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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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마침 목리 사람들 모두가 있었던 터라 어렵지 않게 작업대 위로 옮겼다. 계산했던 중량보다 한참 가볍게 느껴졌다. 화관장식과 손톱 등 아주 작은 조각들은 비닐 지퍼백에 들어 있었다. 0.3미리의 레이저가 잘라낸 6t철판은 마치 고무판을 연상케 한다. 종이를 가위로 오려도, 칼로 두부를 잘라도 이보다 부드럽진 못할 것이다. 우선 작업대 위에서 한 조각씩 떼어내기 시작했는데 0.8미리의 살이 생각보다 질기게 불어 있어서 떼어 내는데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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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화관과 얼굴 단조 후 가접 완료.

 다른 존상보다 선이 가늘어서 우려했던 다문천왕의 이목구비가 생각보다 느낌이 좋다. 작업실 천정에 매달려 있던 고리가 설치높이와 대략 같아 보여서 걸어봤다. 왜소해 보이지 않을 거란 안도감을 느꼈다. 다만 화관장식의 음, 양각 배열은 아직까지 모르겠다. 대단히 잘고 복잡한데도 왠지 밋밋하다. 이번 작업을 위해 새로 설치한 집진기의 성능이 맘에 든다. 좀 시끄럽긴 해도 날리는 분진을 먹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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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낮에 승천이와 성명이의 도움으로 철판을 들어올려 세우고 단조작업이 끝난 광배와 얼굴을 제 위치에 용접했다. 배경판이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인데다 만만찮은 무게 때문에 어렵게 자리를 잡아 고정할 수 있었는데 불길한 징후를 발견했다. 일부 조각의 간격 무려 15미리의 오차. 이미 모델링을 해봤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이 상태로 위부터 아래까지 내려오는 방식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이론적으로도 조각당 1미리의 작은 유격이 15번 합쳐지면 15미리의 오차간격이 벌어지는 결과가 나온다. 당혹스럽다. 단조 시 팽창되는 면적만큼을 주먹구구로 깎아내서 잡아나가는 방식 자체의 오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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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내가 앞에서 판단하고 뒤에서 한 명이 용접을 해 줄 것. 조각의 오차간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다. 결국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작업이란 판단을 내렸고 용수를 부르기로 했다. 그건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한편으로 음양각구성이 걸린다. 내가 만들어낸 약한 볼륨감은 동전의 저부조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화관부위를 다시 해체하게 되면 음, 양각의 질서부터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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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블랙홀의 '삶'

[공허하나 가득하고 멀리인 듯 가까이에 찰나이나 영겁이며 미진하나 존귀하다 無 之 滿 也...]

 도입부터 후반부까지 계속 반복되는 이 불경조의 가사가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돌더니 어떻게 하면 부조에서의 상식적 원근을 벗어날 수 있을까란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정리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원근을 초월한 수백의 개체가 모여 밋밋한 하나의 평면형상을 이루되 채워있지도, 비어있지도 않은 바로 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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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아침잠에서 덜 깬 채로 담배를 빌리러 올라온 윤엽이형이 음, 양각에 대해 조언하기 시작했다. "튀어 나온 게 반대로 아예 쑥 들어가버리면 안되는 거냐?" 라는 그 말에  내 정신이 버쩍들었다. 그랬다. 사실 난 부조에서의 소극적 원근법을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는 6미리의 제한된 범위 탓만 하고 있었을 뿐 이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니 완전히 잠에서 깬 듯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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