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 장용수.
오늘부터 날 도와주게 된 용수가 후질근한 가죽신발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는데 떨그렁 하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올해 학부졸업생, 성실해 보인다 란 인상 말고는 아직 아무런 정보를 모르는 놈이다.기능이 어느 정도인가가 궁금해서 철 작업한 것이 있거든 가져와 보라고 했는데 그게 오늘 가져온 신발이었던 거다.용수가 망치로 두들겨 만든 신발에서 우직하고 의욕 넘치는 복학생의 냄새를 맡았다.
11/19
내가 단조를 하고 용수가 뒷면에서 용접을 한다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단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작업량의 80%라고 할 때, 2인1조의 팀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용수가 30%의 단조를 맡아 줘야만 한명이 기다리는 시간이 없어질 거다. 망치맛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질감의 다양성 측면에선 그게 오히려 좋을 수 있을거란 생각도 든다. 지물 등 중요부위를 제외한 조각 몇개를 두들기도록 해봤는데 어제 본 신발느낌 그대로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망치질이 잘게 부서지는 경향이 있어서 설명을 반복했다.
11/22
지난번에 왔던 그 기사아저씨가 다시 오는 바람에 한결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다. 살의 간격이 0.3미리로 줄어 지난번 보다 조각을 떼어내는데 확실히 고생은 덜었지만 운반도중 분리된 조각의 퍼즐을 두시간 가량 맞추다가 포기했다. 일단 증장천왕은 작업대 밑에, 지국천왕은 밖의 작업대 위로 각각 그대로 덮어두기로 하고 하던 일로 원위치 했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원하던 대로 이제 모든 과제는 쇳조각으로 변한채 내앞에 주어졌다. 이제 워밍업은 끝났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지국천왕의 배경에 스크래치가 난 것이 조금 아쉽다.
11/23
오전 내내 용수가 단조한 조각들을 혼자서 조합하느라고 작업대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해서 허리와 다리관절이 뻑뻑하다. 밤시간부터는 가장 넓은 면적인 비파를 가열했다. 윤엽이형이 빌려준 사다리 위에서 몇 시간 동안을 꼼짝없이 앉아 긴장상태로 작업했다. 넓은 면적은 부담스럽다. 자칫 잘못하면 철판이 가스렌지위의 마른오징어가 되기 때문이다.
11.24
작전을 바꾼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세운 상태에서 2인1조로 단조 된 조각을 하나 하나 더디게 맞춰나갈 일이 아니다. 음, 양각을 판단하고 용접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나중으로 미룬다. 단조는 용수가, 조각의 모서리를 다듬는 일은 내가, 최종적으로얼굴인상과 지물 등 중요부위의 단조는 내가… 공정의 분업. 왜 진작 이 간단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11.25
어제 새로 수립한 방법대로 라면 조각을 붙이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모든 중요한 것들을 일단 보류시키고 작업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단조와 퍼즐 맞추기를 우선 처리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책인 것 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지루한 단순노동이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음양각의 배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가고 싶은 미련이 앞서고 있다. 아쉽지만 손을 떼고 내일부터는 용수와 호흡을 맞춰 계획대로 움직인다.
11/27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지국천왕이 염려스러웠다. 결국 목리인원 모두를 불러 고구마와 커피를 먹이고 회유해서 안으로 모셔올 수 있었지만 작업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몇 번이나 일으켜 세우고 눞이고를 반복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가능한 이동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치밀하게 위치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마감 무렵에 용수와 앞으로의 작업일정을 상의했다. 12월 30일이 설치 예정이므로 늦어도 10일 까지는 단조를 완료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인원 한 명을 더 투입해야 한다. 내일은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용수와의 팀웍을 점검하기로 했다. 과연 하루 동안 얼만큼의 면적을 할 수 있을지...
11/28
따로 골라 두었던 큰 조각들의 단조를 위해 화덕에 불을 지폈다. 불을 피우는 방법과 유지하는 방법을 용수에게 설명했다. 본격적인 화력에 이르자 용수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꺼풀이 얇아졌다. 지금까지 산소토치의 날카로운 불에 비하면 얼마만에 불다운 불을 지른 것인가... 오랫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서운 사천왕에게 주눅들어있던 이근세가 화성공장 공장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12/4
아내한테 전해들은 얘기다. 엄마가 다니시는 절의 스님께 아들이 사천왕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하니 사천왕 불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므로 일이 무사히 끝나면 아주 좋은 일들이 기다릴 것이고 자칫 잘못되면 집안에 안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가족들 모두가 큰아들에게 공력을 나누어줘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몇 주 동안 통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아들이 걱정되셨는지 급기야 찾아 오신 건데 내가 아무리 안심시켜 드리려 해도 항상 역부족이다. 아버지는 가용접 해 논 조각들이 튼튼한 거냐고 우려하셨고 엄마는 아이들은 당신이 맡아 줄 테니 조각을 전공한 며느리 민수와 동생 기세까지 합류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언제나 그 놈의 담배 때문에 살 안찐다고 노심초사하던 아들이 이렇게 무거운 쇳덩이와 씨름하는 모습을 당신들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으니 부모님 걱정은 더 커질 뿐이다.
12/5
목리사람들을 모두 불러 단조가 끝난 광목천왕을 일으켜 세웠다. 광목천왕은 조각의 수가 가장 많고 선이 조밀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선이 간결한 다문천왕 옆으로 세워 얼만큼의 이질감이 드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가열 때 생긴 산화피막과 냉각 시의 얼룩 때문에 복잡해 보일뿐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절반의 단조가 끝난 상황이다. 오늘 용수와 쉬지 않고 호흡을 맞춰 끝낸 양이 겨우 이정도 라면 10일까지 단조를 끝내겠다는 계획은 불가능이다.
12/7
관계자들을 만나 현장에 설치된 프레임을 확인했고 설치시점을 1월 첫째주로 미루기로 한 것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져서 작업실로 들어왔는데 그라인더소리가 요란한 작업대위에 낮선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얼핏 작업대 위를 살펴보니 꽤 많은 양의 조각의 모서리를 깎아 논 상태다. 저분은 누구냐고 용수에게 물었더니 '아니.. 그.. 저..'하는 용수 특유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집진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갑자기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됐고 화가나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작업지시를 멋대로 한거냐고 욕을 했다. 용수는 자기 판단에 12월 말까지 완성을 하려면 아무래도 한명 더 필요할것 같다고 생각되서 마침 연락이 닿은 남효욱이란 후배를 갑자기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지금 조각면을 다듬는 일은 곧 결과물상에서 마감이므로 어떻게 보면 가장 예민한 공정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효욱이가 갈고있던 조각을 검수하고 다시 기분이 회복됐다. 그라인더가 지나간 선이 제법 반짝하고 흘렀기 때문이고 또 한가지는 그 애가 입고있는 작업복에 씌여진 '신속정확'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달 이상 시간이 연장됐고 인원도 늘었으니 시간제약에 대한 부담은 줄어 마음이 편하다.
12/10
용수가 일찍 나와서 불을 피워놨고 오후에는 효욱이가 시험준비 때문에 일찍 들어갔다. 용수의 손놀림이 무척 빨라졌고 해가 저물 무렵 어느새 증장천왕의 단조가 거의 끝나고 있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계획된 할당량을 채운 날이다.
12.11
용수가 오자마자 목리 사람들을 불러모아 증장천왕 앞에 집결했다. 어렵지 않게 일으켜 세웠지만 손바닥만한 화관조각 하나가 승천이의 머리로 떨어지는 바람에 모두 놀랐다. 작업진도가 중요하지만 바쁠수록 안전사고를 주의해야 한다. 이제 지국천왕의 단조만 남아있는 상태다.
12/15
사천왕 작업의 전반전이라 할 수있는 단조가 마무리 단계다. 용수 효욱이는 낼 모래 일요일을 마지막으로 보내기로 했다. 용수는 이미 얘기가 돼 있는 상태였지만 기말고사와 학교수업이 끝나서 이제 부터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고 의욕을 불태우는 효욱이까지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후반작업은 방학을 앞둔 기세와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합류하게 될 민수가 대기하고 있다. 지금부터의 작업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다. 당분간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머리로 판단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자, 난 이제 결론이 보류된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12/16
라디오에서 몇차례 경고했던 일기예보대로 매서운 바람이 불면서 하늘이 변덕스러웠지만 오전에 단조작업이 모두 끝났다. 윤기씨, 승천이, 성명이, 용수와 함께 지국천왕을 일으켜 세웠다. 이로서 네 분 천왕이 모두 일어나셨고 용수와 효욱이는 오늘 부로 이곳을 떠난다. 비닐천정을 뚫고 들어온 오후빛이 아름답다. 많이 했고 또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