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 천왕망치
12/20
이 작업이 시작되면서 부터 느낀거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에 크게 찔리는 한 가지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종교미술이라는 부담감이 그것인데 그건 분명히 내가 연장을 들고 행하는 물리적인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을 다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버거운 재료가 까마득하게 널려 있고 그것을 다루기 위해 몸을 쓰는 동안에는 매번 그 중요한 핵심을 잊게 된다. 작업 이전에 불교의 세계관이나 도상학 등을 알아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장모님께서 빌려주신 불교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쯤에서 책을 덮어야 할 것 같다. 특히 [선의 나침반]. 처음부터 끝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는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 오직 모를 뿐. 불교를 개념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라'는 숭산스님의 법문이 빠른 시간에 뭔가를 들입다 흡수해 보려는 나 같은 자에 대한 경고구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제 미뤄놨던 음, 양각을 배열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 할 단계로 돌아와 있지만 보면 볼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작업실에 검게 서있는 네 장의 철판에는 아직 아무런 형상도 없다. 단조를 끝내고 세우기까지 쉬지 않고 달리면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몸이 따르지 않고 의욕이 바닥까지 떨어진 적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정체되어 있는데 하루하루 시간은 꼬박꼬박 흘러가고 있다.
드디어 증장천왕이 두 눈을 부릅뜨신 날. 조각 배열 문제는 어차피 작업 후반까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로 남기고 일단 현시점에는 얼굴의 인상을 잡아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해 증장천왕의 얼굴을 잡았다. 내일부터는 종강을 한 기세가 들어와서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막상 오면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12/23
민수와 기세를 한조로 묶고 기본적인 요철의 패턴을 정리해서 설명해준다. / 이들이 전체적으로 훑듯이 가용접으로 기본베이스를 깔아주면 내가 부분적으로 수정해가는 방식. /그렇게 된다면 판단하는데 걸리는 많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낮에 예정대로 기세가 왔지만 얼마 전에 오른손이 부러져 뼈에 핀을 박아넣는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저녘먹을 시간이 다돼서 털어놨다. 손을 확인해보니 아직 수술 후 붓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본인은 심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상관없으니 해보겠다고 객기를 부리고 있지만 다친손이 오른손 인데다가 진동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작업은 무리다. 예상치 못한 변수다. 난감하다.
12.24
하루 종일 라디오에선 캐롤송이 나왔고 부러진 손 때문에 연장을 들 수 없는 기세는 연신 카메라셔터를 눌러댔다. 단 3일 동안 이었지만 작업실에 적응하긴 역시 힘들어 보이는 듯 아내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사료를 먹지 않는 개투를 불쌍해했다. 아직도 확신이 없는 가운데 나를 돕고자 이곳에 온 이들에게 확실한 역할분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임무를 받지 못해 계속 불편해하는 기세와 민수에게 작업초반에 중단했던 다문천왕의 하반신을 해보라고 맞겼더니 갑자기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치도, 그라인더도 잡을 수 없는 제약조건에서 많은 활약을 기대하진 않지만 가족이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천군만마와 같다. 매년 그래왔지만 올 해 크리스마스 이부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지나고 있다. 지국천왕의 저 표정이 오늘의 내 컨디션을 말해준다.
12.25
100년만의 더운 겨울. 오전에 들었던 오늘 일기예보다. 과연 오늘의 날씨는 봄을 훌쩍 지나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햇살이 기분과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줬다. 덕분에 광목천왕의 얼굴표정을 빠른 시간에 뽑아낼 수 있었다. 기세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관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던 민수는 청소와 작업복빨래를 하고 마당청소까지 마치고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광목천왕의 이마볼륨이 너무 도드라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단 보류상태로 두고 턱과 수염묘사에 들어갔다. 턱이 붙었을때 혹시나 괞찬아 보일까 했지만 역시나 거슬린다. 내일은 무조건 떼어내고 다시 수정해야겠다. 하지만 가용접한 부분이 수십군데라서 조금 난처하다.
12.28
영하10도. 몇 분 동안 민수에게 알곤 용접을 잠깐 가르쳐줬더니 기특하게도 곧장 뒤쪽에서 용접을 책임졌다. 그나저나 또 다시 이마 볼륨이 맘에 들지 않는다. 벌써 몇 번째 인가. 그러나 될 때까지 잡고 늘어진다. 일요일 까지 네 분의 화관을 모두 완료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다.
12/29
결국 다시 떼어냈다. 따져보니 벌써 5일동안 광목천왕의 이마에 집착했다. 될 때 까지 잡고 늘어진다는 고집도 중요하지만 시간이정해져 있는만큼 남은시간에 수습할 것들도 생각해야 할 때다. 어느정도 작업에 감을 잡은 기세와 민수가 한조가 되어 하반신을 가구성 해나가면 내가 위 부터 하나하나 꼼꼼하게 훑고 내려온다. 그러자면 나와 한조를 이룰 한명의 인원이 더 필요하다. 고민끝에 용수를 다시 부르기로 했다.
12.30
용수가 원재의 용접기를 빌려가지고 들어왔지만 계절학기 때문에 당장은 움직일 수 없다고해서 효욱이를 부르기로 햇다. 다행히 종강을 한 효욱이가 내일부터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된다.
12.31 남효욱 재투입
<신속정확>한 작업복을 입은 효욱이가 다시 왔다.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의욕적인 모습을 보니 꽤나 든든하다. 아직 증장천왕의 화관을 마무리하지 못했으므로 일단 초반에 보류했던 다문천왕의 하반신을 모두 뜯으라 지시했다. 어림잡아 300조각에 달하는 아직 생철상태의 조각들 모두가 또 다시 방진 마스트를 쓰고 집진기 앞에 자리잡은 효욱의 몫으로 넘겨졌다. 민수와 기세가 광목천왕의 하반신을 치고 내려오는 진도가 제법 빨라졌다.
2007.1.1 새해 첫 날
본격적인 두개 조의 팀웍이 시작됐다. 작업실 앞마당에선 윤엽이형이 돌연 아크용접을 배우겠다며 불꽃놀이를 했고 작업실 안에는 온통 기계음과 분진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쇠를 자를 때 날리는 이것이 호흡기를 통해 허파꽈리까지 타고 들어가 박히면 평생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먹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이들한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다. 라인을 다듬고 단조까지 완료한 효욱이의 조각들을 넘겨받은 기세와 민수는 다문천왕의 발목부위까지 내려왔고 화관을 모두 완료한 나는 다시 기세와 민수가 훑고 지나간 광목천왕의 옷주름들을 검토하고 수정했다.
1/3
체력이 바닥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에 심리적 부담감이 더 커진다. 늦어도 10일까지는 내가 상반신을 완벽하게 끝내고 민수와 기세가 하반신 세 폭을 끝내줘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날짜를 맞출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바로잡을 시간은 안되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장담할 순 없다. 이제 남은시간은 불과 2주. 박물관 개관일을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가능한 몇 칠 정도는 시간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약속시간에 맞추는것도 중요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완성도가 더 중요하다. 이미 한번 늦춘상태라서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지만 내일은 심 주임한테 전화를 해야한다.
1/4
작업 후반부인데 작업속도에 전혀 탄력이 붙지 않고 있다. 그 동안 나는 철을 이용해 뭔가를 만든다는 것에 너무 자만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업은 쓰라린 경험이다. 작업성을 감 잡을 무렵,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두렵다. 악귀를 밟아야 할 사천왕이 나를 밟고 있다.
1/6
몇 칠 동안 따뜻했던 봄날씨는 과분한 호사였다. 아침 잠결에 아파트 현관문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를 듣고 대단히 겁먹은 기분으로 작업실에 들어갔다. 눈보라가 이는 겨울 산의 풍경이 바로 보이는 윤엽이 형의 방에서 여느 때와 같이 도시락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몸을 조금 움직여보니 예상보다 덜 추워 잠시 좋았으나 갑자기 눈이 쏟아지는 동시에 천둥까지 치더니 허약한 내 비닐지붕이 곧 날아갈 것처럼 출렁거렸다. 애들은 특별한 경험이라며 재미있어 했지만 사실 난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