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로스커스텀, 2610x 987x240 / 2200x830x240mm, Stainless steel, 2015
윌로스커스텀
그 날. 그냥 물끄러미 먼지쌓인 작업실선반 위를 쳐다본 이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게 슬펐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발견한 그것. 악기아닌 이삿짐으로 남아있는 내 싸구려 전기기타. 20년 동안 작업실을 네 번 옮겨다니면서 왜 난 이 애물단지를 끝내 버리지 못했을까. 쓸쓸한 마음에 녹슬어 끊어진 스틸줄 여섯 가닥을 걷어낸 뒤 기타를 닦기 시작했다.
기억해보니 이 기타가 처음 산 기타는 아니었다. 내 첫 기타는 픽업이 하나 달린 검정색 기타였는데 용돈을 모아 그걸 구입한 날이 서울 올림픽 개막식 날 이었으니까 딱 쌍팔년 얘기다. 그 날은 낙원상가 전체가 문닫혀 있었고 상가 밖 몇 몇 악기상만 열려 있었다. 개막식방송에 정신 팔려 있는 주인아저씨한테 흥정가 8만원을 주고 산 검정색 기타를 둘러메고 텅 빈 버스를 타고 오는데 종로길 풍경이 어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난 매일 매일 레몬향이 나는 스프레이 왁스로 정성껏 그 기타를 닦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타를 완전히 분해하고 대대적인 튜닝을 시작했는데 그건 정말로 과감하고 대단한 결단이었으며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뛸 만큼 예술적인 작업이었다. 그 후로도 난 몇 대의 고물기타들을 거둬들여 튜닝했고 결과물 또한 스스로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래, 뭐 별볼일 없는 내 음악적 재능에 기타리스트가 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 일테고, 이참에 전문적으로 전기기타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빌더가 되어볼까 맘먹었다. 그것은 노력하면 실현 가능할 것 같은 꿈처럼 여겨졌었다. 한때의 그 꿈은 그러나 제대한 뒤에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고 그 후로 지금껏 그렇게 그럴듯한 꿈을 꿔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멍청해진 상태로 두 시간이 훌쩍 가버리긴 했지만 반짝반짝해진 기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것으로 어쩌면 난 이 물건을 버릴 마지막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난 기어이 오늘 중으로 당장 내 기타에 새 줄을 끼워야겠다고 결심했다. 해질 무렵, 내비게이션이 도착지라고 안내한 거기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그냥 시골도로가 한복판 이었다. 역시나 우리 동네에 악기가게가 있을리 없다는 체념감이 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다시 인터넷에서 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맞게 찾아오셨다'... 그러고 보니 언덕 윗쪽으로 뭔가 건물이 서 있긴 했다. 근데 도저히 기타줄 따위는 취급할 것 같지 않은, 갤러리처럼 꽤나 말끔하게 생긴 건물이 거기에 있긴 있었다.
목적이었던 기타줄은 구했지만 범상치 않은 이 건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람한테 물었더니 카달로그와 명함을 주면서 전시실로 안내했다. 윌로스 커스텀기타의 류지수씨. 이곳은 고급 전기기타를 주문 제작하는 공방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옛날 낙원상가를 기웃거릴 때 맡았던 바로 그 냄새가 났다. 전시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천정에서 시작된 환한 빛이 벽면 가득 걸린 색색깔 기타에 몽글몽글 맺혀 들었고 잠들어있는 그것들의 심장소리가 두근두근 들려오는 듯 했다. 세상에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세계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펼쳐져 있을 줄이야. 하얗게 날아가 버린 내 어릴 적 꿈을 실현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동갑내기 류지수씨와 과거 락음악과 기타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끊어진 카세트테잎을 이어붙여 듣는 기분에 들떠 집에 돌아오기가 싫었다.
흥미로운 그곳이 내 새로운 놀이터가 된거다. 난 다음 날, 그 다음 날, 며칠 후에도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 차 안을 뒤져 오래된 명함 한 장을 찾아내 류지수 씨한테 건넸다. 개인적 친분이나 비즈니스 관계를 통틀어 누군가한테 명함을 불쑥 건넨 건 처음이었다. 조각가라 새겨진 내 명함을 받은 그는 건물마당에 기타헤드 모양의 상징조형물을 세우고 싶었는데 제작자를 찾을 수 없어서 지금껏 실행하지 못한 일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런 거라면 두말할 것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나섰다. 나는 그렇게 윌로스기타 특유의 버선코 형상 헤드스탁을 스테인리스스틸로 확대해 건물 마당에 설치하기로 했고 그는 나한테 어릴적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고급진 기타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오랫만에 내 키보다 큰 재료를 혼자 뒤집고 세워가면서 용접을 하는데도 일이 즐거웠다.
류지수씨가 나를 위해 특별 제작한 기타는 한국 커스텀기타업계에서 차지하는 윌로스의 위상이 담긴 최고급 악기다. 그런데 기타가 너무 좋은게 문제가 될 줄이야. 코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실력에 최고급 전기기타를 끌어안고 더듬더듬 크로매틱연습을 하는 호사라니. 분수에 넘치는 기타한테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어 손을 앞 뒤로 뒤집어 살펴보니 울퉁불퉁해진 손마디에 군데군데 박힌 화상자국이 가득이다. 그동안 내 손가락 모양새가 많이도 변했구나. 그래도 난 품에 안으면 뜨거워지는 기타란 물건이 여전히 그냥 좋다. 행복하다.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