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도자료

화성공장 7년의 탐사일지 - 권영진


화성공장 7년의 탐사일지


글: 권영진 (독립큐레이터) / 출처: <경기미술2008>




작가소개

이근세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목리에 ‘화성공장’이라는 작업실을 운영하며 철을 소재로 재치 있는 철물도구들을 만든다. 특별한 기능성을 가진 그의 철물도구들은 전통 대장장이 기법과 장인적인 제작공정으로 만든 것인데, 가까운 지인들을 위해 맞춤식 도구로 제작하여 헌정하거나, 상징적 심리적 기능으로 동시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숙련된 솜씨로 직접 불과 쇠를 다루는 이근세의 철물작업은 생활과 예술, 생산과 창작, 노동과 아이디어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그 구체적인 기능과 형태를 드러내는 일종의 변종 도구라고 할 수 있다.




1. 여기는 화성공장


2002년 화성시 동탄면 목리에 처음 둥지를 틀면서 작성하기 시작한 이근세의 블로그에는 이곳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후~ 완전히 화성이군!”

지난 2002년 봄, 세 명의 동료들과 내가 목리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함께 내지른 탄성이었다. 편도1차선 비포장도로의 끝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주먹만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텅 빈 컨테이너 서너 채가 외계인의 퇴락한 유적처럼 그 파편들 위에 애처롭게 서 있는데, 물기가 말라버린 감나무 몇 주가 또 그 위에 옅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

어쨌든 감을 좋아하던 둘은 남고 감에 무관심했던 두 명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났다. 둘은 이곳의 가장 높은 곳에 그들만의 전초기지를 세웠고 ‘화성공장’이라 이름 지었다. 우리는 감각의 촉수를 최대한 확장시켜 이 낯선 행성을 탐험했고, 그때부터 감이 유일한 생산물이었던 이곳에서 두드리고 펴진 또 다른 생산물들이 출하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감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인물들이 하나둘씩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근세 블로그 중에서)1)


1) 이후 인용하는 이근세의 말은 작가의 블로그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 화성(火星)과 신도시 개발이 예고된 경기도 화성(華城)은 발음상의 공통점 외에도 낯설고 황량한 느낌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 가족의 가장이자 작가로서의 길을 모색하던 이근세는 그 어느 쪽으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화성시 동탄면 목리 143번지 비포장도로의 끝자락, 감나무 아래에 작업실을 세웠다. 그리고 “낯선 처녀지에 도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당황을 위장하기 위해 까닭 없이 지껄이듯이” 새로 정착한 곳에 발을 붙이고 정을 들이기 위해 이근세와 동료 작가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일상의 기록들이 그의 블로그를 빼곡히 채워나갔다. 화성 표면에 착륙한 바이킹호가 쏘아 올리는 탐사기록처럼 30대 청년작가 이근세의 삶과 예술에 대한 탐사기록은 이렇게 송출되기 시작했다.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 붉은 불의 행성이 화성(火星)인 것과 그것의 영어명이 그리스신화의 군신(軍神) 마르스(Mars)의 이름을 따고 있는 것은 이근세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우연에 그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가 화성(華城)에 정착하여 스스로 ‘화성공장(Marsfactory)’이라 명명한 작업실에서 지난 7년 간 만들어낸 결과물이 다름 아닌 불과 쇠를 다루는 철물(鐵物)의 형태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2008년 말에 열릴 이근세의 세 번째 개인전은 화성공장 7년을 기념하고 회고하는 형식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전시장은 무수한 밤 잠 못 이룬 작가의 꿈길을 에스코트한 <수면양>의 안내를 따라 목리창작촌의 생활과 동료예술가들과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회고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전시는 결과물 자체보다는 작가로 하여금 기꺼이 쇠를 두들겨 무엇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동료들과 목리창작촌 공동체에 바치는 헌사(獻詞)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시장에 옮겨진 작가의 작업실과 작업일지를 통해서 “개념미술의 상극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개념인 ‘물질과 노동’이 합쳐진 정상적인 가치를 되찾아내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지가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었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근세의 작업은 생활과 예술, 생산과 창작, 노동과 아이디어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스파크처럼 발화하며 그 형체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곧 있을 그의 개인전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통해 이근세의 화성 탐사일지 7년간의 기억을 살펴보는 과정은 그의 목리창작촌 생활과 함께 우리 시대 창작의 의미를 매우 실천적인 삶의 층위에서 고찰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2. 철 작업의 매력


목리에 작업실을 세우고 철판으로 대문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 휑한 여백을 보고 문득 생각난 단어가 ‘화성공장’이었다고 작가는 밝힌다. 그리고 작업실 명칭을 ‘이근세 조각실’이나 ‘이근세 스튜디오’가 아닌 ‘화성공장’이라고 내건 다음부터 그는 “내 작업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작업실을 순수예술의 창작실이 아닌 ‘화성공장장’으로 규정하고 들어가면서, 그는 막중하게 여기던 창작의 과제가 일종의 역설적인 가치회복의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그는 3D 업종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원시적인 금속가공법 대장장이 기법을 실천에 옮겼다. 이근세는 대장간 ‘화성공장’의 ‘대장장이’가 된 것이다. ‘화성공장’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조금 색다른 물건을 만드는 공장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근세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나무, 돌, 금속 등 재료에 따라 실기과목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미술교육의 학제에 따라 그도 전공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중 금속조 수업에서 남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목조와 석조 작업이 오래고 더딘 제작 과정을 요하는데 비해, 철은 불과 반응하여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데다, 열풀림 처리를 거치면 차고 단단하던 금속이 한순간 부드럽고 유연한 소재로 변하는 특성에 한껏 매료되었다. 철은 온도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솔직하고 담백한 재료였다. 또한 가열된 철은 가공이 용이하며 필요할 때는 곧바로 물에 담가 속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러한 즉시성이 “급한” 자신의 성격과도 잘 맞는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가열된 철에서는 견고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재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철만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금속조 교육은 귀금속 세공이나 스테인리스, 합금 등 현대적인 금속재료를 가공하여 매끈한 기념조형물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근세가 자신과 천생연분으로 여기는 철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대학의 전공교육이 아니었다. 조소과 재학시절부터 ‘금속 잘 다루기’로 이름난 그가 정작 철 작업의 진정한 매력에 눈뜨게 된 것은 졸업 이후 직장으로 선택한 최가철물점에서였다.2)

이곳에서 2년간 철물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이근세는 고객들의 주문에 따라 맞춤제작으로 진행되는 작업 과정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철물을 디자인하고, 그것을 생산현장의 제작자들을 위한 작업시방서로 풀어내는 일을 맡았다. 철물을 직접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주문자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맞춤으로 제작되는 철물 공정을 관리하면서 그는 철물 작업의 특성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그는 공장의 실무자들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고 제작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술대학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철물작업의 실질적인 특성을 현장에서 익힐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궁금증은 아직 전통적인 대장간의 맥을 잊고 있는 몇몇 대장장이들을 찾아다니며 어렵사리 그들의 비법을 전수받거나 어깨너머로 훔쳐보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근대화의 과정을 자력으로 일구어내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금속을 다루는 기법도 전통과 현대의 이름으로 깊은 단절의 골을 사이에 두고 있다. 대학의 금속조 수업은 원시적이지만 기본적인 대장장이 과정을 가르치지 않고, 현대의 금속 산물은 산업화된 제작공정으로 생산된다. 여기서 개인 작가가 금속을 다루기 위해서는 서구적인 금속공예 기법을 익히던지, 아니면 전문 공장에 의뢰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인류문명의 근간이 되었던 전통 대장장이 기법은 그 명맥이 점차 소멸되는 과정에 있다. 반면 공업 현장의 철 제작공정은 흔히 대표적인 3D업종으로 분류되어 그 장점이 작가들의 창작기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요컨대 대장장이는 잊혀진 과거의 전통이며, 금속공예는 현대적인 예술창작의 어법이라는 이분법적인 갈림길 사이에서 이근세에게 결정적인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대장장이들과의 교류였다. 2002년 토탈미술관이 기획한 대장장이 프로젝트(Blacksmith Art Project)에는 핀란드와 폴란드, 헝가리 등 유럽의 여러 대장장이들이 초청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대장장이 기법을 계승하고 그것의 현대적인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는 금속작가들 간의 교류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이근세는 전통 대장장이 기법을 계승하여 그것으로 현대적인 기물을 제작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메탈 아티스트(metal artist)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워크숍이 끝난 뒤에서는 참여했던 유럽 대장장이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작업 현장과 작업 방식을 살펴보며 철 작업의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2002년 화성시 목리에 둥지를 튼 이근세는 이렇게 역동적인 30대 초반을 보내고 있었다. 한 성인이자 가장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서는 법과 작가로서 본인의 선택과 기술적 숙련으로 스스로 창작의 길을 모색하는 여정이 감나무 아래 ‘화성공장’의 화덕과 망치질을 통해서 단단히 단련되고 있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목리창작촌의 동료예술가들과 나누는 대화는 큰 힘과 격려가 되었다. 이렇게 미술과 공예, 순수창작과 응용미술, 미학과 실용성, 전통과 현대성 등, 예술창작의 영역에서 흔히들 의미심장한 시대적 구분이자 대립적인 개념으로 언급되는 요소들이 이근세 개인의 실천적인 모색에 의해서 그 구체적인 통합의 길을 찾고 있었다.


2) 최가철물점은 1990년 최홍규가 서울 논현동 가구거리에 설립한 철물점이다. 국내에 '철물 디자인'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최홍규사장은 철물디자인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대학로에 쇳대박물관을 설립하여 한국 전통 철물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

   


3. 철물로 만나는 예술과 사회


목리창작촌에는 2002년 이근세와 그의 동료들이 처음 자리를 잡은 뒤에 여러 예술가들이 거쳐 갔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이근세와 조각가 천성명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느슨하지만 자율적인 작가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2002년 이후 지금까지 목리창작촌과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우석, 김동민, 임승현, 이근세, 신원재, 천성명, 강길원, 이윤엽, 임승천, 장승연, 윤돈휘, 정원경, 조윤석, 오정현, 최춘일, 이윤기, 손대선, 장세레나, 이기세, 장용수, 남효욱, 신욱진, 김정훈, 박진홍. 이들은 모두 기존의 제도적 장치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이곳의 작업실을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운영한다는 조건에 동의하고 입주가 허락되었다. 서로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은 정기적인 작가 회의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공공기관이나 주요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시가 일정하게 제한된 기간과 공간 속에서 잘 짜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면, 화성시 목리에 찾아든 예술가들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형태의 개인 작업실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미술계의 제도적인 장치와 창작지원이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잃기 쉬운 자발적 동인과 자유로운 창작의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은 목리창작촌이 제도적인 레지던시 시스템이 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철저하게 개인 창작실로 운영하되 서로 일정한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입주조건과 생활요건을 협의하여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지켜왔다. 서울의 위성도시 화성시의 외곽 목리에서 이근세와 동료 예술가들은 ‘예술한다’는 것 또는 ‘작업한다’는 것의 의미를 스스로 설정하고 스스로 집행하는 행위이자 실천적인 생활의 결과물로 규정하고 있었다.


1) 그대만을 위한 도구


이런 목리 생활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우리의 대장장이 이근세의 머릿속에는 점차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스스로 ‘맞춤제작식 도구(custom made),’ ‘신도구(neo tools)’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작은 철물들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인데, 주로 목리창작촌의 동료 예술가들이나 친구, 방문객, 지인들을 위해서 화성공장장 이근세가 맞춤식으로 제작하여 헌정한 철물들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조각가 천성명을 위해서는 <인공안구 이식집게>를 만들어주었고, 역시 조각가인 임승천을 위해서는 그의 큰 손에 맞는 <조각활>을 만들어주었다. 기자 심의주를 위해서는 <폴라로이드 집게>를, 목리 작가들을 찾아와 파스타를 만들어주었던 요리사 김계환을 위해서는 <파스타 계량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모두 그가 애착을 가진 철을 두들겨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도구였다.

정밀한 인체형상의 조각을 만드는 천성명을 위해서는 작업의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안구 부착이 용이하도록 맞춤식 집게를 만들어주었다. 작가의 손놀림이 두개골의 안쪽 면까지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도록 집게의 목 부분은 깊게 휘었고 끝은 반구형 안구를 집을 수 있도록 둥글게 제작되었다. 자신을 닮은 무수한 자기복제의 인간을 만드는 천성명의 작업이 숨 막힌 자기 확인의 과정임을 지켜본 이근세의 애정 어린 선물이다.

큰 손에 비해 서정적인 감성을 가진 조각가 임승천을 위해서는 점토 작업에 적합한 조각활을 만들어주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 베짱이가 켜던 바이올린의 활을 닮은 이 조각활은 나른한 듯 섬세한 임승천의 감성을 알아챈 이근세의 재치 있는 해석이며, 그의 섬세한 감성이 그가 다루는 흙에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도록 고안된 요긴한 도구다.

잡지사 기자 심의주를 위해서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을 수 있는 전용집게를 만들었다. 인상적의 그녀의 손톱을 닮은 집게였다. 목리창작촌을 찾아 작가들을 위해 파스타를 요리해준 김계환을 위해서는 철제 파스타 계량고리를 헌정하여 특별한 만찬을 선물해준 그의 성의에 감사를 표했다. 후배 대장장이 조윤석을 위해서는 그의 망치질 습관에 맞는 수직날 망치를 단조해 주었다. 망치무게 1.43kg, 자루길이 190cm, 헤드각도 6도 하향, 수직날 두께 18mm, 이근세의 세밀한 관찰로 제작된 전용망치를 사용하는 조윤석의 벼림질은 “꽤 안정적”이라는 제작자의 사후총평도 잊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에 빠진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위해서는 아들이 탐내는 게임숍의 <적주검>을 제대로 재현해 줄 계획이다. 웹 세상 속 아들의 꿈을 현실로 끄집어 내준 아버지의 각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근세의 철물도구들은 일견 적절한 기능성과 형태감을 가진 실용적인 도구들로 보이지만, 그 내막에는 이근세가 상당기간 특정 인물을 관찰하고 그 인물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도구라는 특징이 있다. 가위, 망치, 칼 등 일상적인 철물 도구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목리창작촌의 대장장이 이근세가 만든 철물들은 그가 자주 대하는 인물들이나 애정을 가진 대상들을 위해서 그들의 행태나 생활방식, 창작특성 등을 배려하여 만든 섬세하고 특별한 도구다. 이를테면 그 사람만을 위한 맞춤 제작의 도구인 것이다.

헌정하는 인물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스며있는 이근세의 도구들은 올림포스 산의 대장장이 발명가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도구들처럼 헌정 받은 사람들의 손에서 신묘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최고의 신 제우스도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벼락으로 괴물 티폰을 물리쳤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아테네 여신의 방패 아이기스는 천하무적이다. 공업적인 대량생산의 시대에 받는 이를 생각하며 즐겁게 벼려낸 이근세의 도구들은 헌정 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부적처럼 간직되고 괴력을 발휘하는 도구들로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근세의 도구들은 기물은 기물이되 헌정인을 위한 것은 물론 제작자 자신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근세의 ‘그대만을 위한 도구’는 보통 두 개의 에디션으로 제작된다. 이근세가 도구를 선사하고 싶은 사람에게 하나, 그리고 제작자인 자신을 위해서 하나, 이렇게 두 개를 만든다. 이근세의 철물 도구는 실질적인 기능성을 가진 도구인 동시에 작가와 헌정인 사이에 주고받은 교감을 구체화한 특별한 기물이다. 여기서 예술품과 공예품을 구분하는 도구의 기능성 여부는 그리 유효한 판단기준이 아님이 드러난다.

근대적 개념에서 철 작업은 산업적 측면이나 실용적 도구 제작, 그리고 그에 반하여 기능성을 갖지 않는 순수예술품의 제작으로 양분되었다면, 이근세의 철 작업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편리한 기능성을 가진 철물이라는 관점에도 대비되고, 마찬가지로 기능성을 배제한 순수한 예술품이라는 영역에도 대비된다. 그는 주문받은 철물을 만드는 장인이 아니라 스스로 제작의 동인을 느끼는 자발적인 창작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공업적으로 양산된 대량생산품이 아니라, 특정인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도구를 맞춤제작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의 숙달된 솜씨에 의해서 미려한 형태와 적확한 기능성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쓸 수 없는 변종도구의 심리적 기능


이근세는 그에게 따라 붙는 ‘현대의 대장장이’라는 명칭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이 말에는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대량생산의 시대에 대장장이 기법은 수작업과 소량제작의 방식으로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것, 잃어버린 것을 환기하고 되살려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근세는 섣불리 자신의 작업이 전통의 현대적인 계승이나, 남들이 터부시하는 대장장이 기법을 계승한 갸륵한 젊은이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철은 여전히 그의 손에서 요긴하게 다룰 수 있는 매우 설득력 있는 소재이며, 불을 머금어 빨갛게 달아오른 철의 찰진 느낌은 다른 어떤 소재나 기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이기에, 그것이 단순히 잃어버린 전통의 계승이라는 모토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산업화된 철공장이나 세련된 금속공예가의 공방이 아니어도 철은 그 자체만의 강점으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것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특성과 강점을 지니고 있다.

이근세가 자신의 작업실을 ‘화성공장’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화성공장장’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장이 아닌 예술가의 작업실과 장인이 아닌 아티스트를 구분하는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민속촌의 전통 대장간은 이근세에게도 그리 편한 곳은 아니다. 그는 록 음악을 즐겨듣고,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고, 어린 아들과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우리시대의 사람이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철 소재의 특성이자 그것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의 영역이다. 그것이 전통인지, 현대인지를 가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못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불을 머금은 철이 그냥 식지 않고 따뜻한 쇠의 느낌을 그대로 보존한 특별한 기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근세의 도구가 헌정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제작한 특별한 도구이자, 헌정인과 제작자 사이의 특별한 교감을 구체화한 것이라면, 막상 그가 만들어낸 도구들 중에는 실용적인 기능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벼려낸 도구는 정작 사용이 불가능한 도구인 것이다.

그가 만든 그럴듯한 의사(擬似) 도구 <주정뱅이 갈고리>와 <자동차 긁개>, <뿅망치>, <고양이 장의삽> 등을 살펴보자. 이근세는 정교한 철물제작 솜씨를 발휘하여 그럴듯한 기물들을 만들어내고, 그 기물의 사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주정뱅이를 가장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린다”는 주정뱅이 갈고리는 주저앉은 술꾼의 허리띠에 걸고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고안된 도구인데, 사용법의 마지막 항목에는 “경우에 따라 갈고리를 돌려 잡아 대상을 가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문득 시기심과 장난 끼가 발동할 때”는 한손에 쏙 들어오는 자동차 긁개를 권한다. 남의 집 앞에 떡하니 주차된 차를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속 후련하게 긁어버릴 수 있는 매우 요긴한 도구다. 두들기면 뿅뿅 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장난감 망치를 닮은 100톤짜리 쇠망치도 있다. 도시의 대로변에 나왔다가 장렬하게 교통사고를 당한 들고양이를 위한 장의삽도 있다. 이근세는 들고양이의 특공정신을 기리며 그 시신을 처리하기에 적당한 장의삽을 제안한다.

그가 만든 갈고리나 송곳, 쇠망치, 삽은 분명 특별한 기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실제로 사용할 일이 별로 없거나 정작 실생활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변종도구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하나쯤 필요로 하는 기발한 도구들이다. 그것이 자동차 바퀴에 연신 치이는 고양이의 시신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의 뇌리에 떠오른 도구이거나,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 만취한 친구를 바라보는 사람의 난감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해도 분명 매우 요긴한 기능성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도구이며 누구도 주문하지 않은 도구지만 그의 변종 도구들은 철물가게에 진열된 여러 기능적인 도구들을 닮았고, 사용법까지 겸비하여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문득 발동하는 호기심과 충동심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 길가에 방치된 고양이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한 특별한 도구를 그는 제안한다. 즉 그는 누구나 필요한 것이지만 아무도 만들지 않기에 매우 절실한 기능을 가진 도구들을 만든다. 그의 도구는 철저한 기능성을 염두에 두었으되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는 무용의 도구인 것이다. 이를테면 도구의 외형과 조건을 지녔으되, 오히려 사용하지 않고 곁에 둠으로서 심리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특이한 도구인 셈이다.

여기서 이근세의 도구들은 소위 도구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능성의 문제를 살짝 뒤틀어 보이고 있다. “철물을 도구로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이런 기능성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능청스런 그의 질문에 우리는 내심 공감한다. 우리시대의 철물공장장을 자처하는 이근세의 ‘조금 색다른’ 도구들은 철저한 기술과 능숙한 솜씨를 가진 철물 작가가 전하는 아주 특별한 기능성을 가진 심리적 도구다. 그는 철물가게 아저씨처럼 마지막 제스처도 잊지 않는다. “싸게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그런 제안에 따라 이근세의 철물 도구를 구입한 우리는 매우 든든한 심리적 처방전을 몸에 지니게 된다. 심술궂은 생각이 들 때면 언제든 그 심술을 안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매우 요긴한 도구를 갖게 되는 것이다.


3) 철물로 던지는 사회적 발언


현대를 살아가는 철물작가 이근세의 사회적 인식과 현실적인 참여의식 역시 그가 가장 자신 있게 여기는 철물제작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운동가인 친구를 위해 만들어준 <시위촛대>는 한쪽 끝에 초를 꽂아 높이 치켜들 수 있도록 제작했다. “군중 속에서 이 기다란 촛대를 높이 들어 너의 가슴에서 끓는 피를 더 높게 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친구의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기원하고 ‘폭력 없는 세상에 핀 한 송이 불꽃’이라는 이름도 함께 지어 보냈다. 그러나 그 촛대는 거꾸로 쥐었을 때, 진압경찰의 곤봉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된다. 이근세는 이 도구의 사용안내서에 거꾸로 잡으면 “화상의 위험이 따른다”는 경고의 문구를 넣어 우리 사회를 둘러싼 갈등과 모순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겸하고 있다.

미군부대 이전을 위해 국방부에 강제 수용된 경기도 평택 대추리 일대를 방문하고 나서는 <대추리 쇠스랑>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대변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철제 <거짓말> 낙인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논쟁과 그를 둘러싼 거짓말 공방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는 장치다. 새빨간 거짓말을 낙인하는 과정은 그것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결과물로 오래토록 남을 것임을 시연하고 있다. “난처할 때 망설이지 말고 바로 내밀어 보라”는 제안과 함께 등장하는 철제 <오리발>은 어이없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행동주의적 반격을 의미한다.

의례적 행사의 개막식 테이프 커팅용으로 주문받은 가위는 <그들의 권위와 위상에 걸맞은 가위>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누가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명백한 엿장수 가위다. TV 뉴스의 국회 회의장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글동글한 나무망치 대신 이근세는 단단하고 묵직한 철제 망치를 선물한다. 의사봉을 두들기며 안건의 통과를 선언하는 행위가 실상은 엄청난 폭력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비꼬아 지적한다. 이근세의 대형 철제 <의사봉>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형태로 자행되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시각적 구현물이다.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여성의 관능적인 몸매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S라인의 커브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의자를 제작해 준다. “당신은 진정한 S라인입니까”라는 물음과 함께 제시되는 이근세의 <S체어>는 ‘격한 굴곡’의 몸매를 갖지 않은 사람이 앉을 경우에는 매우 불편한 의자로,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기준인지를 시각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이는 갈수록 고조되는 현대사회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반어법적인 코멘트가 된다.

이근세는 단단하고 묵직한 철로 가볍고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무엇보다 철이 견고하고 묵중한 소재이기에 그것으로 던지는 가벼운 농담은 특별한 반어적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평론가 김종길이 지적한 대로, 이근세의 변종 도구들이 보여주는 ‘어이없음’의 행동주의와 ‘이유있음’의 실천철학은 쇠의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묵직한 쇠의 신뢰가 있기에 그것을 통한 가벼운 비틀기는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사회적 발언과 현실적 참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근세의 철물들은 그의 숙련된 솜씨로 완성되기 때문에, 그것의 완결된 형태미에 대비되어 그것이 강조하는 비현실성이 더욱 예리하게 부각된다. 비현실적인 기능성으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인식과 계층적 갈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매우 신랄한 시각적 논평이 성립되는 것이다.

철물 명인의 손으로 제작된 이근세의 사회적 도구들은 실용적인 기능성과 기물로서의 유용성의 범위를 넘어 우리시대와 사회에 대한 작가적 표현과 비판의 도구가 되고 있다. 그는 가장 정교한 대장장이 기법으로 우리시대의 병폐와 은폐된 모순을 매우 구체적인 철물의 형태로 비판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구보다 철 작업에 자신이 있다는 이근세는 그의 숙달된 솜씨를 전통의 이름으로 한정된 공예품이나 토산품을 만드는 데 쓰지 않는다. 12지신을 연상시키는 닭과 소는 사실상 최근 우리사회 전체를 시끄럽게 했던 조류독감과 광우병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알 대신 포탄을 품은 <AI닭>이나 힘없이 무릎을 꿇은 <다우너소>는 같은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작가적 단상을 전달하고 있다.

이근세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예술가로서 동시대의 이슈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함께 고민하는 우리시대의 예술가다. 따라서 그가 전통 대장장이 기법으로 제작하는 철물들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나드는 위치에 존재한다. 그에게 철 작업은 여러 소재와 기법 중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오랜 숙련으로 비로소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만의 표현어법이다. 그의 철물작업은 철소재의 공예적 기능성이나 실용적 부자재라는 기존의 관념을 넘어, 사용자의 손에 의해서 그 활용도가 자유롭게 확장되고 변형되는 예를 보여준다. 철물은 이근세에게 있어 그만의 표현법과 자신감을 드러내는 예술창작의 언어이자 시대적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 위한 긴밀한 방편이 된다.


4) 철 단조 사천왕상


서울 조계사 내에 위치한 불교중앙박물관에는 이근세가 제작한 철 단조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2006년 이 작품을 위촉받은 이근세는 그해 겨울 내내 사천왕상과의 치열한 싸움에 매달렸다. 직지사 후불탱의 사천왕상을 참조하여 어렵게 밑그림을 얻은 이 불교조상을 특히 철을 소재로 제작해 달라는 주문은 철을 다루는데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이근세에게 각별한 도전이자 특별한 관문이 되었다.

이근세는 이 사천왕상 제작에 높이 2.85m, 폭 1.2m, 두께6t의 철판을 이용하여 각각 선조형식으로 그린 사천왕상을 레이저로 오려낸 다음 각각의 작은 철판조각들을 단조로 가공하여 요철감을 낸 다음 다시 원래의 형상으로 재조립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처음 샘플 제작으로 느긋한 자신감을 가졌던 이근세는 네 장의 거대한 철판에 조각된 사천왕상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철물 명인으로서 본인의 한계에 직면하는 위기를 느꼈다.

그가 의도한 방법은 평면의 철판에 철판 두께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부조의 형식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기법인데, 직지사 탱화초의 범상치 않은 기운과 무수한 철 조각을 단조기법으로 가공하여 철판이 늘어난 만큼 형태를 수정하여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노동의 양에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방법이었는지를 깨닫는 작가의 모습은 그의 블로그에 처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2007년 초 봉안일을 앞두고 자기와의 극한 싸움에 도전하여 그는 용케도 철 단조 사천왕상을 완성해냈다.

현재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이근세의 사천왕상은 정교한 탱화초의 선묘가 레이저 커팅의 현대적인 공법으로 되살아나고 무수한 망치질로 정교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전통 대장장이 기법이 혼용된 결과다. 얼마나 많은 철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 노동으로 단조되고 얼마나 많은 고민으로 용접되었는지, 그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철 단조 사천왕상의 뒷면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2006년 겨울 범상치 않은 사천왕상의 위세와 화성공장 작업실을 꿰뚫는 추위, 무지막지한 노동의 양에 짓눌려 거의 극한의 한계를 체험하는 시기로 보냈던 이근세는 종교예술품의 조상과정과 그 제작기법의 선택에 있어서 작가의 선택과 제작기법의 숙련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근세의 철 단조 사천왕상은 작가적 해석과 기법적 능숙함으로 전통 대장장이 기법을 독창적으로 되살려낸 실천적인 경우다.



4. 목리창작촌 7년의 수확과 추억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철제 기물부터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종교예술품까지 이근세의 철 작업이 구체적인 생산물로 결실을 맺은 것은 2002년 목리에 들어와 작업실을 세우고 동료들과 함께 작가 공동체 생활을 꾸리면서부터였다. 2002년 첫발을 디딜 때 황량한 행성처럼 느껴지던 그곳에서 이근세는 기존 미술계 시스템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자신만의 표현어법을 스스로 일구어냈다. 유배생활 같던 목리 생활은 스스로에 대한 도전과 동료들의 격려 속에서 서서히 자발적인 표현의 경로를 찾아갔다.

순수예술과 금속공예의 경계는 제도적인 관행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전통 대장장이 기법을 익히고 그것으로 그가 원하는 철물이나 도구를 제작하고 새로운 표현법으로 적용하면서 하나씩 해법을 모색해 갔다. 그 과정에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전승되지 않는 전통 대장장이 기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익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표현어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존 관념을 뒤집고 화성공장 특유의 생산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가 만드는 기물이 여느 철물점이나 철공장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완벽한 형태와 완벽한 기능성을 가진 것이기를 요구한다. 기법적 숙련도가 표현의 가능성과 병행하여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는 철 작업 특유의 장점을 발견하고 기존 미술계의 평가나 기준을 염두에 두지 않는 독창적인 제작과 자발적인 표현의 동인으로 일구어갔다.

작가는 비교적 판매가 용이한 저가의 공예품으로 제작한 철물들은 의외로 반응이 좋지 않은 반면, 주변의 지인들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철물들이나 재치 있는 반어법적 의미를 내포한 철물들은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서 스스로 작업에 대한 가능성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2002년부터 그가 화성공장에서 제작해온 철물들은 기존 금속공예나 철조각의 어느 범주에도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의 철물은 스스로의 아이디어로 형태를 구상하고, 헌정할 사람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애정 어린 헌정품이다. 그의 철물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철제 기물들이 갖지 못하는 심리적 기능적 공백들을 역설적인 어법으로 채우고 있다. 철물이 기능상 건물이나 인테리어의 필수적인 부분이자 부자재로 적합하다는 개념은 그것이 그렇게 사용될 때에만 적용된다.

이근세는 스스로 자처한 화성 유배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창작하고 스스로 선택한 재료와 기법을 통해서 사회 및 예술과 소통하는 법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가 생산해낸 철물들이 미술 교과서의 어느 부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순수미술계에서는 더욱이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철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우리시대의 대장장이’로 불리는 이근세의 입지를 설명한다. 섣불리 ‘전통의 현대적 부활’이라는 감상적인 트레이드마크로 그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철저하게 실천적이며, 무엇보다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있다. 그렇게 만든 산물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용하고 애정 어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작업을 가동하는 힘이다. 그는 성실한 노동의 흔적과 일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작업으로, 전시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순수예술품에 내포된 기만적인 예술의 의미를 뒤집어 보인다.

무엇보다 목리창작촌 7년간의 기간이 그에게는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창작하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08년 말 이근세의 세 번째 개인전은 목리창작촌 생활 7년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회고하는 형식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양 한 마리를 헤아리며 처음 화성에 정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양 두 마리를 헤아리며 목리창작촌의 상징인 감나무의 첫 수확을 기억한다. 양 세 마리를 헤아리며 컨테이너 작업실에 페인트를 칠하던 때를 떠올린다.

헤아리는 양의 수가 늘어갈수록 7년간 그곳에서 함께 한 동료 예술가들과 거기서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의미를 두어야할 지를 고민하던 그에게 같이 생활하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 모든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살가운 목리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일깨워진다. 거기에는 엄연한 창작촌 식구로 자리 잡은 유기견 개원, 개투도 있고 들고양이 나리도 있다.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끓여 함께 허기를 달래던 동료들의 모습이 있다.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들을 통해 보는 세상으로 이근세는 자신만의 철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화성표면의 우주선에서 송출하는 탐사일지처럼 지금도 그의 블로그를 채워가고 있다.



5. 또 다시 세워질 화성공장을 위하여


이근세의 화성공장을 비롯하여 목리창작촌 일대는 2009년 말 동탄 신도시 개발이 예고되어 있다. 이미 윤곽을 드러낸 1차 신도시 개발로 이 일대 풍광은 상전벽해의 놀라운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 예고되고 토지 수용을 위한 행정적인 과정이 진행되면서 목리창작촌의 작가들은 어제든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춰두고 있다. 다소 불안하고 불안정한 그 시기에 서로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었던 것은 같은 고민과 같은 목적을 지닌 동료들의 존재였다.

불모지 화성에서 따뜻한 철물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목리 생활을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로 회고하게 된 이근세의 화성 탐사일지는 그 대단원의 막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화성에 불시착한 탐사선처럼 낯선 정착과정을 거쳐 따뜻하고 정감 있는 그만의 철물들을 만들어냈듯이, 아마도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될 그의 작업실은 그 이주를 통해 또 다른 창작의 불길을 지피게 될 것이다. 옮겨가는 또 다른 행성이 어디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화덕을 만들고, 땅땅거리는 망치소리를 활기차게 울릴 것이다. 또 다시 세워질 ‘화성공장’의 다음 생산물을 기대해 본다.

 

Lee, Geun-Se <Seven-Years Diary in the Marsfactory>

Kwon, Young-Jin
.... Kwon, Young-Jin(Art Critic

 Lee Guen-Se makes interesting metal tools and single-handedly runs the
‘Marsfactory’ in Mok-ri, Dongtan-myun, Hwaseong.. City in Gyeonggi
Province. He produces metal tools of special functions, crafting them using
traditional blacksmith techniques. They are usually made to order or offered
to close acquaintances. They also offer a symbolic and psychological critical
point of view as on contemporary society.
When he had this studio built, Lee called it ‘Marsfactory’, not ‘The Lee
Guen-Se Sculpture Workshop’ or ‘The Lee Geun-Se Studio’. At the
beginning of his art career, and as a father, he discovered the city
Hwaseong, quite strange and desolate, but he did not simply name it after
188. ART IN GYEONGGI 2008
the city, whose name is pronounced the same as the Korean word for the
planet Mars. What he has produced in the Marsfactory for the last 7 years
take form as ironware, and the planet of fire in English is named after the
Ancient Greek god of war, Mars. It is too hard to imagine that this happened
only by chance.
While he studied sculpture as an undergraduate, he was fascinated with
metal work, in particular iron work. Wood work or stone work usually
require a long and slow manufacturing process, but the character of iron
that changes immediately when fired seemed similar to his own impatient
personality. He was known for ‘handling iron,’ but he only got to discover
the real possibilities of iron after having graduated university and starting
work at Choi’s Hardware. Working for two years as an ironware designer,
he found immense pleasure in making iron goods to order for customers.
Sometimes, his masters, who have been keeping alive the traditions of the
smithy, would teach him some of their secrets. The ‘Blacksmith Art Project’
held twice at the Total Museum of Art gave him a good chance to exchange
ideas with European blacksmiths. Taking this opportunity, he became sure
of the possibilities of metal art, creating modern wares and creative work
applying traditional forging techniques. Thereafter, many artists came to
join his atelier, so in Mok-ri, an artist community has been formed around
the Marsfactory. Adapting himself to the Mok-ri Art Village’s creative
process and slow but liberal daily life, Lee felt the urge to make some
interesting tools for his colleagues. He started to make small ironware that
189.
....Hwaseong has the same pronunciation as the Korean word for the planet Mars.

participating in reality. He made the <Demonstration Candlestick> for his
social activist friend to hold it up with a candle on the spike at the top. But,
if you hold it by the other end, it easily becomes to a truncheon. By noting
in the manual, “If you hold it by the wrong end, you run the risk of getting
burned,” he makes a vital warning and a sharp criticism about the conflicts
and troubles in our society.
<Daechuri Rake> is a comment on the bitter conflicts between
inhabitants of Daechuri in Pyeong-Taek and the US military who moved one
of their bases there. The red-hot iron brand <Lies> is intended as a visual
evocation of the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s of lies around the social and
political issues in our society. With a note informing “When you are in
trouble, just reach it out,” <Duck’s foot..1> makes an activist counterattack on
absurd social reality. The ceremonial scissors ill-matched with the title
<Scissors well-matched with their authority and status> are in fact for a ‘yeot’
peddler...2 He makes a silly and weightless joke with heavy and solid iron. It
is the reliable features of iron, its solidity and gravity that re-enforces this
impression. The silly joke cut by the solid iron attains a special contradictory
implication from being made in the form of practical ware.
Lee, Geun-Se.. Kwon, Young-Jin 191.
he calls ‘custom made’ or ‘neo-tools,’ usually offering them to colleagues,
friends, visitors, acquaintances in the Mok-ri Art Village. For his friend
sculpture Chun, Sung-Myung, he made a pair of <Transplant Tweezers for a
Glass Eye>, for sculptor Lim, Seung-Chun, considering his big hands, he
made a <Sculpture Bow>, <Polaroid Nippers> for journalist Shim, Eu-Joo,
and a <Pasta Measuring Ring> for the cook who visited the Mok-ri artists
and cooked for them.
On the surface, his tools seem normal, designed to suit their function. In
fact, each of them is a ‘tool just for you’, made as the result of a long
observation of the recipient, considering their job, habit, attitude etc. He
designs these tools for the person but also for the artist himself. Thus, he
normally makes two of each tool, one for the beneficiary, another for
himself. His tools have a practical function, while at the same time are
special ware expressing a particular sympathy between artist and the
beneficiary.
Nevertheless, some of the tools seem far from practical. Tools that he
forged with great care are actually beyond utility. His faux-practical tools
<Drunken Hook>, <Car Scratcher>, <Toy Hammer>, <Cat Funeral Shovel>
are actually not usable although are for a certain purpose, or are just not
useful. With the helpful manuals he also provides, Lee’s mutated tools
display their psychological function through their and physical condition
even without being used. Somehow, they are special.
His ironware implies also his awareness of society and his intention for
190. ART IN GYEONGGI 2008
..1..There is a Korean idiom, literally “to show your duck feet”, which means “to feign innocence.”
..2..Yeot’ is a kind of traditional Korean taffy made from wheat gluten, and the yeot-jang-su(taffy
peddler) attracts potential customers’ attention by clanging together the scissors he uses to cut the
taffy. There is a Korean idiom, literally “as the taffy peddler wishes,” which means “as the person who
has power wishes.”

where he moves to, as he has been creating warm and emotional ironware
even in the harsh city. Who knows which will be his next planet, but he will
somehow build a brazier, and vigorously beat some iron, clang-clang.
Lee, Geun-Se.. Kwon, Young-Jin 193.
There is the iron-forged <Four Devas>(the four heavenly guardians of
Buddhism) enshrined in the Seoul Jogye Temple Museum of Buddhism. To
fulfill an order to make iron Devas in 2006, Lee applied an experimental
technique. He laser-cut figures of the Four Devas drawn on a 2.85m..1.2m
iron plate of 6mm thickness, with the painting of Buddha which hangs on
the wall of Jikji Temple as his reference. Then he reassembled each iron
piece after forging them to get a rough surface of iron relief. It is a
technique to maximize their three-dimensional effect in the depth of iron
plate. Lee had to endure a terrible winter in 2006, controlling himself under
the unusual energy of the guardians and the tough physical labor. It could
be said that The Four Devas that he eventually completed were born from
the contemporary laser technique which gave rebirth to the lines of the
painting, as the result of endless traditional hammering that animates the
delicate texture.
From small ironware to immense religious sculptures, Lee’s iron work
gave concrete result only after he opened his atelier in Mok-ri where he has
built up a community with his colleagues. During this period, he had the
chance to slowly find his own way of expression thanks to his colleagues’
encouragement and challenging himself. The 7 years in the Mok-ri art
village meant to him more than anything, and formed the indispensable
basis for discovering the pleasure of creating something himself.
The area of the Mok-ri art village is scheduled to move due to a new
town development. Hopefully, his passion for creation will continue to burn 

- ART IN GYEONGGI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