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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事

사천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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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욱이는 무척 영리한 놈이다. 내가 앞면에서 감을 판단이 서지 않아 머뭇거릴 때, 뒤에서 과감하게 용접스위치를 눌러댔다. 작업진행이 이쯤 되다 보니 뒷면에서도 판단이 작동한다는 얘기겠지만 앞으로 열흘이 채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 작은 미련에 집착하는 나를 자기 선에서 통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부 3학년생 이지만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효욱이의 이런 모습이 놀랍고 든든하다. 지국천왕의 오른발까지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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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하루에 서 너번 씩 라디오에서 들리는 공익광고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자란다'는 말은 너무나 와 닿는 말이다. 예고 없이 아버지가 호준이를 데리고 오셨는데 이렇게 작업실에서 가족을 대할 때면 뭔지 모를 낮선 느낌을 는다. 일주일 단위로 친가와 외가의 부모님들이 번갈아 가며 아이 둘을 맡아주고 계신 덕분으로 지금의 내 고통을 아내가 덜어주고 있지만 그 고통은 어디로 없어진 게 아니라 가족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음을 지 않는다. 작업을 할 땐 모든 것을 잊어야 유리해진다. 그래서 내 작업실의 시계는 언제나 멈춰있다. 그러나 혹시 어느 한곳에서 정체된 내가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한 해가 다르게 힘이 빠져가는 부모님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다른 종류의 조바심이 난다. 가족을 생각하면 언제나 미안한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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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네 분 천왕이 모두 작업실 출구를 향해 돌아섰다. 작업초반 나를 괴롭게 했던 다문천왕 앞에 다시 섰다. 오늘은 다문천왕의 완성을 목표로 출발했으나 하반신의 수정을 조금 했을 뿐 아직 까마득하다. 이분은 시간이 임박해져 허둥지둥인 나를 다그치듯 내려다 보고 계시다. 서, 동, 남천왕을 거치는 동안 회복된 내 자존감이 다문천왕 앞에 또다시 주저 앉았다. 측판의 두께는 60mm로 결정했으나 레이저 발주는 오늘도 하지 못했다. 음각으로 새겨질 내 이름과 낙관의 초안을 기세와 민수가 컴퓨터로 작업했지만 한자의 획이 복잡해서 레이저로는 불가능 할 것 같다. 이것의 대안을 빨리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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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핸드폰에 녹음된 호민이의 목소리를 듣다가 잠든 민수가 너무 지쳐 있었다. 측판 발주와 작품서명의 대안을 고민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에 카메라를 떨어뜨려 면박을 들은 후로 더 힘들어 하는 듯했다. 작품서명은 컴퓨터조각으로 가야 된다는 판단에 기세를 을지로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민수를 따라가도록 지시했다. 오히려 냉동창고 같은 작업실에 날 두고 가는 것을 미안해하는 애들을 보내고 4시가 다 돼서 작업이 시작됐다. 갑자기 몸살기운이 느껴졌으나 효욱이와 정신 없이 달리다 보니 컨디션이 조금 회복됐다. 11시가 넘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진도를 볼 수 있었고 내일 전화로 컴퓨터조각의 가능여부를 통보받기로 했다. 지금 쯤 민수는 호민이 호준이를 꼭 끌어 앉고 잠들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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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에서 컴퓨터 조각이 불가능하다는 기세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정남면에 있는 워터젯 공장을 찾아갔으나 헛수고였다. 다행히 기세가 알아본 마지막 방법인 cnc로 가기로 했지만 60만원이란 만만찮은 견적이 나왔다. 사실 이 마당에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 한가지 걸리는 부분은 장담할 수 없는 음각의 깊이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니 그만 잊기로 하고 작업에 전념했다. 교정작업 시 망치질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서 분실된 조각들이 문제다. 랜턴을 들고 작업실바닥 구석구석을 기어다녀도 끝내 찾을 수 없는 조각은 30개 정도. 레이저 재발주는 이번이 세 번째. 모든 조각들은 가 용접으로 간신히 매달려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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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상의 품위를 배려해 포장재료와 같은 작은 부분까지도 간과해선 안된다고 강조하시던 아버지께서 손수 나무틀을 짜가지고 오셨다. 아직까지도, 언제나 미덥지 못한 서른일곱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항상 마음 쓰시는 아버지께 죄송스럽다. 효욱에게 북방의 화관을 떼어내라 주문했고 세분의 손을 모두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모든 단조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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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욱이는 다문천왕의 분실된 조각을 새로 만들 것. 민수는 석필을 들고 석연찮은 부분들을 꼼꼼히 체크할 것. 작업 종반으로 갈 수록 힘든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타협과 그것에 대한 미련이다. 이쯤 진행된 상황에서의 내 눈은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으므로 아이들의 눈을 믿기로 했다.  오늘 목표는 미련이 안남도록 최종수정 할 것. 타협에 다시 타협... 복잡한 심경으로 작업에 집중했다. 지국천왕과 광목천왕 역시 네 시간 여 만에 끝을 봤고 막판까지 날 가장 힘들게 하고 있는 다문천왕의 오른쪽 옷주름까지 바로 잡는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효욱이는 지국, 증장천왕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용접을 해나갔으며 난 이 진도를 피해 지국천왕의 마감에 들어갔다. 준비된 기름을 바르자 얼룩의 톤이 내려가는걸 확인했고 이것 때문에 기분이 썩 괜찮아졌다. 내일은 작품 두께면의 용접을 위해 종성이가 오기로 했고 기세가 cnc를 찾아오는데 그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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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  形의 이면에서 像을 보았다.

 

 다문천왕의 화관장식의 고정을 마지막으로 모든 조각들의 고정을 마무리 했다. 이제 며칠 후면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이 작업이 종료될 것이다. 작업이 힘겹게 진행되는 동안 줄 곳 난 예상치 못한 변수에 고통스러웠다. 철을 재료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자신 있다고 생각해온 호기는 지금껏 내가 가진 유일한 에너지원이었다. 그러나 형태만을 쫓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사천왕은 이미 멀리 떠나고 없었으며. 쇳조각 이상, 이하도 아닌 수 백 개의 개체들은 응집을 거부한 채 빈공간을 표류했다. 나 역시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가 숨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카오스. 난 형상을 이루는 음양의 질서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것은 작업 중반, 예상치 못한 고통에 빠진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가 치유법이다. 그 덕분에 난 부조에서의 소극적 입체를 탈피할 수 있었으며 조형에서의 점, 선, 면을 초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난 오만 딜레마로 엉켜있는 검은 철판 안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손바닥 만 한 것에서부터 가루에 가까운 조각까지, 수천 개의 불을 먹고 두들겨진 철판조각들이 결론을 보류한 채, 붙여지고 다시 떼어지고를 수 없이 반복하는 과정이 더딘 속도로 진행됐다. 어떻게든 이 혼돈 속에서 상을 찾아내야 한다는 조바심과 불확실성이 나를 괴롭혔다. 이제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된 오늘, 작품의 뒷면을 점검하다가 작업과정 중 수백 차례 절개 되고 용접이 거듭된 상처들을 보고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에 젖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다문천왕 이었다. 설령 내가 본 그것이 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엔 4개월 동안 오직 사천왕 만을 생각하던 내 고민과 땀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3일 후면 철판으로 영원히 덮여지게 되겠지만 오늘 본 뒷면의 그것이 내 몸과 정신으로 경험한 진짜 사천왕이라고 믿기로 한다. 그러나 아직은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다. 봉안되는 그 순간까지 또 어떤 변수가 기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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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작품의 두께면 용접의 총 길이는 45미터 정도로 양도 만만찮고 작업성이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요령이 탁월한 종성이를 불렀다. 느리지만 그 특유의 차분한 손놀림으로 연장을 챙기는 종성이를 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용접기 2대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아 병진이의 알곤용접기를 추가로 빌려왔다. 저녁이 다돼서 기세가 찾아온 cnc역시 걱정했던 것보다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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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밤 9시 경, 과연 오늘 끝날 수 있을까? 란 불안감이 들자마자 안 좋은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광목천왕의 두께면이 바나나처럼 휘어 있는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경험상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이 아니었기에 보강책을 충분히 썼는데도 피할 수 없었던 참담한 결과다. 평소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는 종성이도 무척 당황스러워 했다. 이미 12시가 넘은 시각, 애들은 밤을 세워서라도 바로 잡아보자고 의욕을 불태웠지만 오히려 내가 아이들을 타일러 모든걸 중단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 너시간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고 체력이 떨어진 상태로 보내는 작업실에서의 새벽시간은 총알처럼 빠르기 때문이다. 오전에 심주임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대단히 곤란한, 심각한 상황이다. 재료의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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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스럽게도 박물관측의 양해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를 벌었다는 말에 모두들 기뻐했고 다시 일사분란하게 각자 맡은 일에 집중했다. 이 상황에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건 시간이다. 우선 틀어진 광목천왕의 두께면을 절개했고 조심스럽게 용접마무리를 했다. 성명이와 승천이 윤기씨는 오늘 하루 거의 자기작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릴 도왔고 기세는 부러진 손에 무리가 오든 말든 몸을 던졌다. 오후 들어 컨디션이 안좋은가 싶더니 해가 떨어지고 급속도로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축 쳐져서 정신까지 멍한 날 대신해 15kg가까이 되는 벨트센더를 들고 작업을 끝까지 마무리해준 효욱이의 뚝심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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