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현대화!”
이 썩은 구라를 무덤에서 꺼내라!
- 이근세의 철조각 ‘사천왕상’의 현대적 의미
김종길 | 미술평론가
이 글은 하나의 ‘구호’이길 바란다! 이근세의 철 조각 <사천왕상>은 20세기 한국미술의 사기극 주제였던 “전통의 현대화!”라는 구호를 다시 떠 올리게 했으며, 이를 통해 21세기의 과제를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갑작스레 등장한 천재성이거나 그야말로 전통의 현대화를 성취한 위대한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젊은 작가가 전통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태도와 현대성의 발휘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신하는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것은 단지 <사천왕상>일 뿐이다. ‘사천왕상’이란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천왕상을 만들었다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작품을 만들기 이전엔 ‘전통’의 형상성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작품이 빛을 발한다.
그는 쇠에 미쳤다. “미쳐야狂 미친다及”는 ‘말씀’의 진정성은 그에게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쇠를 잘 다루고 싶어 ‘최가 철물’에 입사한 그다. 이곳에서 쇠의 성질과 맛을 알았고, 쇠만이 가질 수 있는 ‘격格’을 보았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쇠를 통해 이룩했던 문화의 깊이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육감이자 본능인지 모른다. 불과 교합한 뒤 내 보이는 시뻘건 쇠의 본능과 형상을 위한 ‘두드림’의 본능은 ‘도구적 인간’의 위험하고 성스러운 교합이 아닐 수 없다. 그 뜨거운 ‘몸’의 격정이야말로 서로를 안위하는 카타르시스일 테니까. 그렇게 쇠는 그에게로 왔고, 그도 쇠에게로 갔다.
쇠가 가벼워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본능의 상실에서 온다. 한낱 부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최상의 기능성은 쇠를 아름답게 한다. 수레바퀴의 구슬이 그렇고, 칼과 호미가 그렇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자본이 되거나 자본을 위한 ‘가짜’로 둔갑했을 때는 다르다. 그 순간 쇠는 묵언수행의 수도사에서 간교한자의 세치 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쇠는 죽임과 살림의 양 극단에서 늘 위태로운 길을 선택받는다. 무녀의 칼은 악귀를 물리치고, 어머니의 칼은 가족을 살리지만, 강도와 살인자의 칼은 생명을 죽인다. 이근세는 ‘살림’의 쇠를 만들고 싶었다. 쇠의 멋이 한껏 발산하는 조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화성시 동탄의 목리마을에 화성공장이란 대장간을 연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참으로 다종다양한 쇠 조각을 부화시켰다. 그러나 수 년 동안의 이 과정은 ‘조각가’에서 ‘장이’로 단련시키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 아니 처음부터 그는 조각가가 될 생각을 버렸다. 그 소망이 가져 올 작가적 부채의식을 견뎌낼 재간도 없거니와 작가적 위대성과 같은 환상이 애초부터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에게 솔직했고 쉽게 그것을 잊었다. 이런 일련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쇠는 그에게 ‘점진적으로’ 다가왔는데,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쇠의 신뢰’이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입이 간지러운 광대들처럼 우리 앞에 서기만 하면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쇠와 그가 황홀한 교감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과 관계의 계통 망에 살고 있는 ‘의뢰인’들의 도구로 탄생한 쇠는 특히 압권이다. 이 관계의 미학에 숨겨진 그들의 ‘어이없음’의 행동주의와 ‘이유 있음’의 실천철학은 쇠의 신뢰 없이는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쇠와의 뜨거운 교접이 잉태한 ‘현실-응어리’ 처방용 일침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듯 열 오른 순간에 다가온 것이 ‘사천왕상’ 의뢰였다. 그는 모든 것을 정지하고 이것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쇠로 만들어 달라는 의뢰인의 기이한 의뢰도 그랬거니와 ‘사천왕상’이 가진 조형의 맛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한 번 결심하게 되자 무섭게 빠져 들었다. 이것저것 자료를 모으고, 조형미가 뛰어난 형상을 찾아 나섰다. 균형과 절제, 위엄과 괴기를 내뿜는 것이라야 사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의 그것을 뛰어넘는 한국성의 조형성이 잘 표현된 것이라야 했다. 여기서 선택된 자료가 기본골격을 형성해 주었다.
철판을 디지털 컷팅으로 세밀하게 재단한 다음 작업실로 옮겨와 온전한 형상으로 다시 이어 붙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판’의 평면성을 해체하고 요철처럼 입체구조로 재구성했다. 잘게 나뉜 조각을 이렇게 조립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요하기도 하지만, 한 치의 실수를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 다음 단조鍛造에 들어갔다. 그는 이 과정에 그가 터득한 정수를 쏟아 부었다. 한 부분이라도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마음을 조절했다.
그는 부처를 모른다. 사천왕상도 모른다. 그 수많은 불교의 도상과 인물을 전문가인들 다 알 수 있을까. 역설이겠지만, 모른다는 것은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름’은 ‘앎’의 상대어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누가 ‘앎’인가. 부처인가 나인가. 부처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 차이가 있는가. 만약, 앎이 곧 깨달음이라면, 우린 모두 ‘모름’이지 않은가. 그는 몰랐기 때문에 사천왕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그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렇듯 조형이 뛰어난 작품을 토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천왕상은 작가의 내부로 들어가 욕망의 덩어리를 꺼내어 질끈 밟았다. 작가 이근세는 그렇게 밟고 서 있는 사천왕을 토해낸 것이다. 그 자신으로부터, 그 내부로부터 튀어 나온 이 형상의 생생함은 도상학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전통의 현대화를 부르짖는다. 과거의 정신을 외치면서 현대의 새로움을 조장한다. 환골탈태에 동참하라고 위협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행태의 진실을 찾아보기 힘들다. 껍데기만 요란하다. 무녀가 비키니를 입고 활보하는 듯한 ‘가짜’가 판을 친다. 비꼬고 틀어서 살짝 뒤집어 놓은 꼴로 ‘현대화’의 완성이라 자찬하고, 대머리 흰 수염의 인물을 신비한 스승으로 추앙하며 ‘전승자’를 자처한다. 우리 시대엔 참으로 그런 고수들이 많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붓과 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사각의 화면과 영구성을 자랑하는 물질성의 신화를 여전히 강구한다. 그 안에서 한국성이니 자생성이니, 이상한 전통의 사기극을 펼친다.
소재주의가 먹히지 않으니 도구주의를 내세우고,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서구식 방법론과 형식론을 ‘전통’이라 목청 높이면서 ‘현대화’라는 모순의 이중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전통을 신비화하는 따위, 현대화를 무슨 완장인양 강조하는 따위의 무지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구라를 때려치우고 진짜 현대화가 무엇인지 그 진실의 ‘전통’을 무덤에서 꺼내야 한다!
김지하는 소련이 해체되고 전 세계의 냉전구도가 대 전환기에 휩싸여 세기적 변동이 일어나던 1990년대 초에 동학을 사유한 『동학이야기』란 책을 내 놓았다. 그는 이미 1980년대부터 자신의 저항 미학을 ‘생명’에 두고 ‘동학’을 탐구하기 시작했었다. 오랫동안 지혜를 갈구해 온 이 시인의 사유는 동학에 와서야 비로소 웅숭깊은 샘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샘물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다음같이 덧붙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저 파천황의 대동란기에 동양의 전통 사상을 떨치고 나오면서 서양 근대의 충격에 창조적으로 응전한 이 민족 종교의 사상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탈근대 지구화와 지역자치 사상과 생명의 세계관 발견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의 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 이근세의 작업에서 발견한 것도 ‘창조적 응전’이라 할 것이다. 서양 근대의 충격에서가 아니라 ‘장이’의 시대적 상실과 위기, 그야말로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절실함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그가 이 응전의 실체를 놓지 않기를 바란다. 현대 한국 불교조각의 역사가 ‘현대화’의 오명을 입고 ‘현대’를 상실한 작금의 상황에서, 이근세와 같은 ‘작가-장이’기질의 시대적 호명은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이다. <사천왕상>은 21세기 한국 불교조각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책무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보듬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