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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페인트깡통 여닫개

이진경 선생을 위한 페인트깡통 여닫개_ 225*32*16mm, 2017






홍천에서의 네 번째 공동작업.

 

 

이진경 선생은 전기주전자 스위치를 누르며, 일단 차를 한잔 마신 다음, 갈색 닭 한 마리를 마저 칠한 후에, 자신을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화통화에서 도착하면 부탁할 것이 있다던 그 말은 도끼질을 하다가 손을 다쳤으니, 운전을 대신 해달라는 말이었던 거다. 얼룩덜룩한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을 가만 들여다보니, 앉아서 차나 마시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페인트 깡통을 열어놓은 김에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출발하자는 그 말은 무시하는 것이 마땅했다. 눈길에 강하다는 그녀의 suv를 운전해 홍천읍내로 달렸다. 엑스레이실에서 나온 그녀는 복도 대기 의자에 앉아 스스로 붕대를 풀었다. 엄지와 검지를 잊는 갈퀴살이 브이자로 벌어져 있었는데 나 같았으면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바닥을 구르며 119를 외쳤을 터, 그런데 시종 저렇게 평안한 표정이라니... 60대 중반 의사는 마취주사가 매우 아플 거라고 심드렁하게 겁을 줬으나 수술실 밖으론 어떤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깨끗해진 붕대를 감고 작업실로 돌아온 그녀는 춤을 추듯 페인트를 찍어 붓질을 시작했다. 다시 태어나게 되면 몇 번이고 사람으로 태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며 마치 새로 태어난 생명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현시대 공장제 사육에서 시작해 유라시아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동물의 상징성을 거슬러 불교의 윤회론까지 흘렀다. 여러 생. 보살도의 선업을 지어갈 이진경 선생께 페인트 깡통을 한 손으로 여닫기 편리한 도구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