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 구 한>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날을 잡고 간판을 만들어 전시한다기에 나도 선뜻 해보겠다고 했다. 철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재주를 최대한 발휘한다면 아마도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제간판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작업실 가는 길에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간판들을 관찰했다. 저건 마치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알록달록한 곰팡이 같다. 시에서 돈을 들여 나무를 심고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잘 다듬어도 여전히 도시풍경이 시끄러운 이유를 이제야 정확히 알겠다. 좌, 우로 시선을 움직이면서 운전을 하다 보니 호객꾼들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언짢은 느낌이 들면서 멀미가 났다. 난 뭘 만들더라도 크고 요란한 건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간판에 관련된 사진들을 검색했다. 오래된 유럽의 철물간판들, 동인천 삼치거리에 있다는 재미있는 간판들. 최근에 좋은 간판 상을 받은 간판들, 꽤 인상 깊은 사례들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면서도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처음에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철제간판을 무턱대고 만들지 않기로 했다. 간판 그 자체보다 우선 구체적인 대상과 장소성에 대해 고민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마침 오래된 친구 놈이 정육점 개업을 준비한다고 해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래. 니놈은 운이 참 좋은 녀석이다. 이미 걸어 놓은 새 간판에는 큰 글씨와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커다란 실사 인쇄 현수막까지 이어 붙여놓았다. 너무 산만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친구는 간판이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 눈에 띈다고 하면서 소 돼지모양의 조형물이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 공짜로 간판을 걸 수 있었던 니놈이나 작업소스를 놓쳐버린 나나 좋다가 말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간판은 건물에 핀 꽃과 같다고 생각한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께서는 ‘건축주는 건물을 사용할 권리만 가지고 있을 뿐 건축물 자체의 소유권은 사회와 시민에게 있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간판 역시 단순히 호화롭고 거창한 것을 내걸어 일단 사람들의 주의부터 끌고 봐야 한다는 목적성 이전에 그것의 공공적 가치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이런저런 생각만 하다가 작업 대상과 작업할 시간을 다 놓쳐버린 나는 결국 내 작업실 화성공장의 간판을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 윤엽이 형이 써준 글씨를 철판에 다시 배열하고 얇은 선으로 찢어서 틈을 만들어 낮에는 음영의 차이만큼 글자가 보이고 밤에는 그 틈에서 엷은 빛이 새어나오도록 했다. 그냥 흰색으로 칠한 이유는 몇 달 후에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게 될 예정인데 그곳의 벽 색깔이 어떨지 몰라서다. 혹시 나중에 택배기사가 간판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욕을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입구 쪽 얌전한 자리에 문패 삼아 걸어두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긴 하다.
간판 화성공장_ 800*800*55mm, 냉연철판 페인트도장, LED,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