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에게 가구를 디자인해본 적 있냐고 묻는다면 요리사에게 드레싱을 만들어본 적이 있냐는 질문만큼이나 우문愚問일 것이다. 공간을 설계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를 디자인하는 것은 작업의 연장이자 화룡점정일 테니까. 최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비트라 의자전에 전시되는 대부분의 의자들은 세계적인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작품이다. 아쉽게도 그곳에는 한국 건축가의 작품이 없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구가 상품화되는 통로가 막혀 있는 듯하다. 상품화를 최종 목표로 국내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가구를 전시, 기획한 쇳대박물관의 ‘건축가의 가구-열두 명의 건축가가 만든 금속 가구전’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국내 최초로 시도하는 건축가들의 가구전, 어쩌면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미래의 비트라 의자전에서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전시회에 소개될 작품 중 일부를 미리 만나보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들이 만든 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땅 위에서 올라오거나 땅 아래로 내려가거나 장윤규 씨의 ‘스프링 테이블’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한 장의 종이에 나이테 모양의 선을 몇 개 그려서 오리고 종이 네 귀퉁이를 그대로 잡아 올린 모양. 바닥 위로 올라온 면은 테이블 상판이 되고 나이테로 그려진 곳은 나사못처럼 땅 위로 솟았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허공에 떠 있는 종이에 나이테 모양으로 선을 그려 오리고 그 나이테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모양. 역시 종이 면은 상판이 되고 오려진 나이테는 스프링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종이라면 떠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겠지만 장윤규 씨가 디자인한 스프링 테이블은 철을 소재로 한 덕에 바닥 위에 단단히 서 있다. 스프링을 내리느라 또는 올리느라 구멍 뚫린 테이블 상판은 유머러스하고 테이블 아래 스프링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건축가 장윤규 씨는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건축가그룹 운생동 대표로 2001년 일본 저널 <10+1>의 세계 건축가 40인에 선정되었다. 최근작으로는 신사동 예화랑이 있다.
티타늄 흔들의자의 여러 가지 상상 황두진 씨의 ‘까오’ 원래‘까오’의 전신은 나무였다. 나무 의자는 100% 나무로 만들어지기 힘든 반면 금속은 온전히 그 재료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금속 까오의 태생은 보다 순수하다 할 수 있다. 새롭게 태어난 까오의 선택은 티타늄. 티타늄은 다른 금속에 비해서 강도 대비 가볍다는 강점이 있기에 보다 날렵하고 산뜻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 만약 다른 금속을 사용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거대한 흔들의자가 탄생했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탱크처럼 보인다 싶은 이 흔들의자는 실제로 탱크 구조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험한 지형에서도 포신의 각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탱크처럼 앉는 부분과 몸체가 핀으로 연결, 구분되어 있어 의자가 흔들린다 해도 앉는 부분의 각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것. 황두진 씨는 (주)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로 국민 한옥론을 제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해냄출판사)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최근 서울에 한옥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가장 설계를 의뢰하고 싶어하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수십 개 철봉에도 꽃이 핀다 권문성 씨의 ‘플라워 베드’
신기한 일이다. 벽을 뚫고 나오는 수십 개의 철봉들이 한데 모여 벤치가 된다. 물론 철봉의 뾰족한 끝마다 무른 나무 공을 꽂아 몸에 직접 닿는 부분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아준다 해도, 제아무리 철이 강하고 단단하다 해도 저토록 가는 철봉들이 사람의 몸을 지탱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답은 ‘그렇다’. 제목 ‘플라워 베드’. 꽃밭으로 이름 지어진 이 벤치는 독립된 의자라기보다는 벽에서부터 시작된, 벽의 일부분이고 벽의 연장이다. 탄소봉(강한 탄성을 지닌 금속) 수십 개가 신기하게도 그곳에 앉는 사람의 무게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다소의 쿠션감마저 느끼게 한다. 철은 무겁고 단단하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것. 수많은 가느다란 봉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과연 저것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고, 그 위에 살짝 앉아보는 용기를 내게 하여 어느새 본모습인 벤치로서의 역할을 드러낸다. 권문성 씨는 (주)건축사사무소아뜰리에17 대표이사로 안동교회와 임진각을 레노베이션했고 일신방직그룹 청담동 사옥을 설계했다.
1. 왼쪽 테이블에 스프링을 매단다는 발상으로 상판과 스프링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스프링이 매력 포인트.
2. 제작협조 현대 티타늄
3. 왼쪽 벽을 뚫고 나온 탄소봉 끝에 나무 공을 달아 벤치를 만들었다. 철봉들은 서로 촘촘한 간격을 유지, 무게를 지탱하는 힘을 만들어낸다.
도시와 건축 사이의 틈 또는 여백 승효상 씨의 ‘긴 의자.가로등'
승효상 씨는 최근 그가 설계한 건물인 중국 차오와이 소호의 로비에 놓을 것을 염두에 두고 벤치와 가로등을 디자인했다. 그는 가구란 기능성이 있는 조형물이자 공간과의 연계성을 지니고 있는 공간 속의 부속물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그가 만들어낸 가구는 공간의 시작이자 공간의 축소판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번 전시회에 소개되는 반듯한 듯하면서도 부정형적인 긴 의자를 통해 그것이 놓이게 될 차오와이 소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긴 의자와 가로등은 ‘빈자의 미학’에 이어 그가 던진‘어번 보이드urban void’라는 화두에 맞닿아 있다. 어번 보이드, 도시와 건축 사이에 존재하는 그 틈에 이것이 자리하게 될 것이고 이곳에 앉아 있다 보면, 빛을 받다 보면 공간은 물론 시간의 여백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승효상 씨는 이로재 대표로 대학로 쇳대박물관, 웰컴시티, 수졸당 등을 설계했다.
가냘픈 철망의 부드럽지만 단단한 다짐 최두남 씨의 ‘LC-V’
자세히 보자면 최두남 씨의 ‘LC-V(Light Screen-Vertical)’는 가느다란 철망 메탈 메시metal mesh로 만든 모듈 박스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책장이다. 메탈 메시는 가느다란 철선들의 연속이 만들어진 면으로 그것이 입체가 되는 순간 그 섬세한 선들의 집합은 공간을 채우나 공기는 투과시키는, 막힘과 열림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가는 선이 철망이 되고, 철망이 하나의 모듈이 되고 또다시 이것들이 모여 구조물이 되는 과정에서 의외와 반전이 연속적으로 생겨난다. 무릇 단단한 줄만 알았던 철은 철사 상태에서는 아직 그 힘을 갖지 못하지만, 그것이 촘촘한 밀도를 지닌 철망이 되고 그것으로 만든 모듈들이 조합될 때 비로소 철다운 단단함을 얻는다. 그렇다 하여 이 구조물이 차갑고 직선적인 면모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24개의 모듈 박스는 하나의 거대 단위가 되면서도 안으로 살짝 굽은 웨이브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다른 단위가 옆으로 나란히 연결되었을 때 자연스레 S형태를 이루게 된다. 단단한 줄만 알았던 철에서 유연함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최두남 씨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최두남건축사사무소(주) 대표다.
육중한 쇠의 시각적 다이어트 최문규 씨의‘ha’
테이블 ‘ha’는 ‘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쇠는 무겁다, 차갑다’라는 답을 쥐고 이를 거스르는 가구를 디자인한 것. 쇠의 무게를 최소화한 길고 얇은 스틸 판재 두 겹을 구조적으로 연결하여 ㄷ자 모양의 테이블로 접었다. 또한 쇠의 차가운 기운을 사탕처럼 달콤한 컬러로 페인팅해 녹여냈다. 두 겹 판재 사이의 좁은 공백 역시 철이 가진 육중함을 시각적으로 상쇄시키는 효과를 낸다. 테이블 곳곳의 귀여운 동그라미는 의외의 위력을 발휘한다. 위판의 타공은 폭이 160cm 정도인 테이블 상판의 무게를 줄여주고 아래 판의 프레스로 눌러 동그랗게 파인 문양은 위 판의 힘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 동그라미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이 가구를 통해 일부 실험된 것. 쇠의 본성 파악이라는 진지한 출발점을 지닌 테이블 ha는 최문규 씨 지인의 득녀를 축하, 그 이름 앞자를 따서 지었다. 전시회에서는 또 다른 지인의 딸 ‘보영’의 이름을 딴 접시‘bo’도 함께 전시할 예정이라고. 최문규 씨는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인사동 쌈지길, 헤이리 딸기를 설계했다.
1. 왼쪽 긴 의자는 누군가와 함께 그러나 서로 각자 앉을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자리 사이의 틈은 그가 던진 화두 어번 보이드를 연상하게 한다.
2. 오른쪽 빛을 받아 섬세한 선들이 드라마틱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책장, 선반은 물론 공간을 구분 짓는 파티션 역할을 하기도 한다.
3. 왼쪽 두 겹의 판재를 접어 상판과 다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디자인의 테이블. 오목하게 눌린 입체감 있는 동그라미는 쇠의 무게를 지탱해주고 동시에 시각적인 포인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건축가의 가구는 건축가를 쏙 빼닮았다”
전시 기획한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의도는? 나는 최가철물점을 운영하는 경영자이자 대장장이다. ‘쇠’라는 소재를 이용한 가구는 그동안 수없이 만들어왔다. 건축 재료로 쇠를 무수히 사용하는 건축가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과연 어떤 가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건축가가 가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건물을 설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쇠의 캐릭터가 가구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대장장이로서 확인하고 싶었다.
건축가가 만든 가구는 어떻게 다른가? 작품만 보고도 누구의 작업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이 건축가의 생김새, 그의 캐릭터를 빼닮았다. 공간과 함께 디자인한 가구가 아니고 가구만을 독자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라서 그런지 더욱 디자이너의 개성이 드러나는 듯하다. 쇠라는 재료의 성질을 이용해서 구조적으로 풀어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건축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이들보다 재료에 대한 파악이 정확해서인지 오히려 ‘쇠’라고하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자유로운 디자인, 쇠의 본질을 온전히 인정한 가장 쇠다운 디자인 등 양극단으로 풀어내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상품화를 목적으로 이번 전시회가 기획되었다고 들었다 물론이다. 이번 전시회는 국내 유명 건축가 12인이 직접 디자인한 가구를 소개한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된 전시일 게다. 이들이 만든 가구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깝다. 현재 만들어진 가구 중 일부는 상품화를 계획 중이다. 30년 경력의 대장장이로서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디자인의 가구가 한꺼번에 등장한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건축가의 가구전뿐만 아니라 쇳대박물관은 지난해 열.쇠.전(열 사람의 쇠작업 전시) 등 여러 작가들에게 한 가지 주제를 던지는 전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 기획의 의도는? 쇳대박물관에서 기획하는 전시는 차별성, 전문성, 자유로움 등을 모토로 한다. 한 가지 주제가 각 분야 전문가들에 의해 자유로운 해석을 만나는 모습은 언제나 즐겁다. 다음 전시회는 ‘조각가의 생활용품전’이다. 재료에 대한 제한도 없고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생활용품을 조각가들은 과연 어떻게 풀어낼지 사뭇 기대가 크다.
“그들의 가구에서 철의 유연함을 발견했다”
쇳대박물관 제작팀 이근세 씨
12명의 건축가들이 참여, 그들이 디자인한 가구를 선보이는 이번 전시회에 동원된 이들은 사실 이보다 더 훨씬 많다. 디자이너 이외에도 전시 기획, 제작 등 ‘무대’ 뒤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시장에 소개되는 가구들의 실질적인 가공과 제작의 최전선에 쇳대박물관 제작팀인 이근세 씨와 최기준 씨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가 가능했다. 총 12명의 건축가 중 9명의 가구 제작에 참여한 이근세 씨를 만났다.
처음 기획 당시 건축가들과 미팅을 하고 디자인 스케치과 구체적인 도면을 받고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근세 씨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고 말한다. ‘과연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가구는 어떤 모습일까’하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이 작업은 철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건축가들의 신선한 발상을 확인하며 공부하고 자극받는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처음 그들이 보내온, 너무도 기발하고 회화적인 드로잉을 보면서 ‘건축가들은 꿈을 꾸는 이들이 아닐까’, ‘과연 이것이 가구라는 이름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사실 실제로 건물을 짓는 이들이 건축가이기에 보다 현실적이고 무난한 디자인을 제시할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에 짐짓 놀랐던 것. 하지만 직접 제작을 시작하면서 그것은 감성적으로 보이는 이성적인 구조물이었음을 깨달았고, 금속이라는 소재가 조형성을 가질 때 어떤 매력을 얻게 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리적인 상식과 기능, 인체공학, 미감 등을 고려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었다면 쇠라는 물질이 형태에 따라 변하는 변수를 최소화해서 디자인 의도를 최대한 구현해내는 것은 제작자의 역할이었다. 만약 그에게 제작 일지가 있었다면 매일 가장 많이 써 내려갔을 말이 ‘의외였다’가 아닐까. 금속만으로 가구가 된다면 기능성이 떨어질 것이라 여기고 평소 철은 부속물이 되었을 때 더욱 빛난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가구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면서 사라졌다. 철에 대해 그간 가졌던 단단한 선입견들이 건축가들에 의해 발견된 철의 유연함으로 인해 종적을 감추고 만 것이다.
이근세 씨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메모, 그 사람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사물을 철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작업을 하는 금속공예가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대장장이라 부르는 그는 평소 자신의 작업 스타일이 이번 가구 제작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건축가를 만나고 그의 디자인을 제작물로 옮길 때 건축가의 모습과 캐릭터를 떠올리며 작업에 임했던 것. 경기도 화성에 있다 해서 화성 공장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작업실 풍경과 작품은 홈페이지 www.marsfactory.org에서 만나볼 수 있다.
'건축가의 가구-열두 명의 건축가가 만든 금속가구전’은 3월 24일(금)부터 4월 30일(일)까지 쇳대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에서는 권문성, 김영섭, 김영준, 김인철, 김종규, 민현식, 서혜림, 승효상, 장윤규, 최두남, 최문규, 황두진 씨 등 국내 유명 건축가 12인이 디자인한 가구 총 32점을 만날 수 있다. 월요일 휴관. 문의 02-766-6494
출처_행복이 가득한 집
기자/에디터 : 심의주 기자 / 사진 : 박찬우
취재 협조 쇳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