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파베르의 ‘도구적 조각’
- 미술평론가 김종길
- 미술평론가 김종길
여기 꿈을 꾸는 조각가가 있다. 그의 꿈은 불이요, 별이요, 땀이다. 불은 별을 만들고, 별은 공장을 만들었다. 몇 년 동안 그가 쏘아 올린 별들은 난쟁이들의 신비를 간직한 채 마술에 휩싸인 광대의 몸짓처럼 떠다닌다. 화성시 동탄면의 목리는 땀이 응결하는 망치소리로 가득하다. 이곳은 화성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근세라는 조각가가 있다. 인류가 초기문명을 쌓아 올리자 후대의 인류학자들은 이들에게서 ‘도구적 인간’이란 별칭을 부여했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모두 도구적 인간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도구를 만들지 않는다. 도구를 쓰는 것에 명석할 뿐 자신을 위한 어떠한 도구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근세는 호모파베르(Homo Faber)이다.
작가 이근세는 화성공장 공장장이다. ‘작가’는 이때 ‘아티스트artist’와 ‘제작자manufacturer’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호칭이다. 그는 아티스트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고, 또한 단순 제작자로 말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화성공장은 대장간이다. 쇠를 녹이고 두드려서 도구를 만든다. 그래서 그를 대장장이라 부르고 싶지만, 이 또한 그는 거추장스런 외투처럼 맞지 않아 한다. 그럼 뭐라 할까? 생각해보면, 그는 작가이자 제작자이며, 대장장이면서 공장장이다.
작가 이근세는 그의 ‘작가적 기질’에서 비롯된다. 그가 제작한 작품들, 혹은 도구들은 유용한 기능성을 위해 탄생했지만, 그 유용성이란 것이 관념의 빈틈을 희롱하거나 사회적 관습 따위를 비트는 ‘도구’로도 작동한다. 즉 이때의 작품은 ‘도구적 조각’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작품이 된다. 그 사례는 〈폭력 없는 세상에 핀 한 송이 불꽃〉이란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제작 동기는 이렇다.
돈휘에게 (중략) 아참, 내 정신 좀 봐라, 본론을 빼놓고 글을 닫으려 했구나. 얼마 전에 병상에서 낳지도 않은 몸으로 집회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의 시위문화는 참으로 아름답더구나. 언젠가부터 집회 때마다 수천의 군중이 들고 있는 평화로운 촛불들의 장중한 행렬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더구나. 그래서 사실 오늘은 너에게 주려고 촛대를 하나 만들었다. 뭐 별거는 아니지만, 나는 이 촛대의 이름을 ‘폭력 없는 세상에 핀 한 송이 불꽃’이라 지어보았다. 군중 속에서 이 기다란 촛대를 높이 들어 너의 가슴에서 끓는 피를 더 높게 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부디 내가 만든 이 촛대가 너한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며. - 05년 11월 29일 목리에서, 화성공장장
우리는 그가 만든 촛대의 형상이 시위대의 곤봉과 흡사하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곤봉을 뒤집어 손잡이 끝에 초를 세우게 한 의도는 ‘폭력’에 대응하는 ‘비폭력’의 상징을 드러낸다. 그리고 폭력의 페이소스는 이 도구적 작품의 주의사항이 타전한다. “그림과 같이 잡지”말라고 하면서 “화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포즈는 전경의 시위 진압자세다.
제작자 이근세는 아이러니다. 제작이 ‘주문’이라는 수동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의 ‘제작’은 자발적이며 창의적 접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주문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문에 의한 ‘시방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두(말) 시방서라는 느슨한 방식의 요구에도 그는 호락하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느낌’의 체계가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만이 그를 이끈다. 그러니까 ‘망치’라는 두드리는 기능의 도구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망치를 만들지만 그 자신의 내부와 몸의 느낌이 응집되는 형상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우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이 사례는 같은 창작촌에서 작업하는 조각가 천성명을 위한 작업도구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천성명의 인체조각에 부착되는 인공안구를 위해 ‘인공안구집게’라는 독특한 도구를 제작했다.
대장장이 이근세는 운명적이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가 지금까지 매료된 것은 ‘쇠’를 다룬다는 것 이상이하도 없다. 그는, 익히 알려진 ‘최가 철물’에서 수년 간 철 조각을 했다. 조각이 파인아트(fine art)안에서 어떤 ‘순수 조형’를 고집해야 한다는 고루한 아집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불에 달군 쇠를 두드려 사용 가능한 물질로 전환하는 대장장이의 노동만이 그의 순수였다. 그가 만든 많은 조형은 이러한 순수의지에서 시작되었다. 판화가 이윤엽네의 까부리(진돗개 이름), 올챙이 모양의 문고리, 병따개, 메기, 자라......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옛 대장장이가 아니다.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편의 도구가 과거의 생산물인데 그가 두드려서 찾은 형상은 재기발랄한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눈여겨 볼 것은 칼과 도끼, 긁개와 같은 도구들도 방짜배기 도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화성공장장 : 산신령님 저는 그런 명품도끼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전 사실 변변찮은 대장장이거든요. 대강 만들어 투박하긴 해도 저의 땀과 손때가 묻은 도끼가 좋습니다. 산신령 : 오호 대장장이라! 나무꾼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더욱 이 명품도끼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것들을 마다하다니 너의 욕심 없는 성품과 훌륭한 직업정신에 또 한번 감동했노라. 너의 마음은 알겠으니 더 이상 사양 말고 나의 선물을 받아가거라 정직한 대장장이여. 화성공장장 : 아이참 정말 됐다는데 그러시네요 정말루 됐거든요? (독백) 치이~ 속 좁은 노인장 같으니라구. 없으면 없는 거지 삐져가지고 몽땅 다시 가지고 들어갈건 뭐냐 말이야.
그럼에도 난 그가 생뚱 맞는 표현일지 모르나 그는 공장장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화성공장(火星factory)의 역어에는 공장장의 꿈이 녹아 있다. 그가 최근에 주문 제작한 사천왕상은 모든 호칭이 녹아서 ‘공장장’이 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때로 유희적 끼가 넘치는 소품들이 그의 아우라처럼 번져 나갔지만, 사천왕상은 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 가의 ‘비법’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대장장이 이근세는 물질의 속성이 변환되어 신성을 얻는 쇠의 비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