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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전원속의 내집 - 이세정

차가운  철에  생명을  불어넣는  남자
현대판 대장장이 이근세



블랙스미스. 검은 철을 다루는 사내를 부르는 말이다. 경기도 화성 목리에 가면 대장간 불속에서 쇠를 두드리는 이근세 씨를 만날 수 있다. 차갑고 딱딱한 쇠는 불만큼이나 뜨거운 그의 열정에 닿아 새로운 오브제로 탄생하고 있다. 생명력을 가진 화성공장의 유물들은 천천히 세상과 조우하기 시작한다.  취재·이세정 기자 | 사진·변종석 기자

 


 
바람개비를 이정표 삼아 목리창작촌을 찾아가는 길. 마을 깊숙이 들어서자 어디선가 귀를 에는 쇳소리가 들려온다. 섭씨 9백도에 달하는 열과 여기저기 날리는 쇳가루들, 도심과 결코 융합할 수 없는 화성 공장은 민원들을 피해 시골마을 비포장길 끝에 있었다.
행성 화성의 이름을 딴 공장 마당에 착륙한 순간, 크고 작은 철제 조형물들과 눈인사를 하고 주인장을 찾았다. 노란색 군용 깔깔이잠바에 뿔테 안경을 낀 흰 얼굴의 남자. 이근세 씨가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 나온다.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하는 작업이 있어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지금은 대장간에서 검은 철을 두드리는 젊은 작가다. 쇳대박물관으로 꽤나 알려진 최가철물점에 몸담고 있다가 5년전 전업작가의 꿈을 위해 목리창작촌에 들어왔다.
 
젊은 예술인들이 모인 목리창작촌 스토리
목리창작촌은 예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만든 아지트이다. 입주자들은 회화와 조소, 공예 등 다양한 주제로 각각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이 곳의 젊은 작가들은 마을 전체로 전시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정류소와 양미소에 벽화를 그리고, 마을 곳곳에 바람개비와 솟대를 설치해 두었다.
창작촌 1세대인 이근세 씨 역시 개울가 다리에 곡선을 살린 철제난간을 설치해 정성을 더했다. 지금은 이토록 생기 넘치는 마을이지만, 예전엔 달랐다. 2002년 봄 동료들과 처음 이 곳에 찾은 이근세 씨는 그 때 심정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공터에 주먹만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죠. 텅 빈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있으니 완전 쓰레기더미 같았어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행성 화성(Mars)이라고 할까, 그 첫인상이 주는 황량함이란.”
그는 그 순간부터 사람의 흔적이 없는 낯선 처녀지에서 탐험을 시작했다. 물기가 말라버린 감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컨테이너를 이어 화성공방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감이 유일한 생산물이었던 이곳에서 두드리고 펴진 또 다른 생산물들이 출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쇳소리와 철가루 뒤에 남는 그의 철제작품들이었다.


 
자연 속에서 끌어오는 작품의 소재
그가 만드는 소품들은 농기구 장식과 나비를 닮은 촛대, 물고기 손잡이 등 사람과 친근한 소재가 모티브가 된다.
“저의 일상이 작품이 된다고 해야죠. 공장과 집을 오가는 기계적인 하루지만, 그 속에 사물과의 만남, 사람과의 대화는 늘 같을 수 없거든요.”
그는 늘 시각을 날카롭게 다듬는 훈련을 한다. 흘깃 지나가는 말들을 메모하고, 주변 사물에 혼잣말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 작품 중 유독 동물형상이 많은 점은 자연과 한층 가까워진 그의 생활 덕분이기도 하다.
“딱딱하고 차가운 쇠로 동물을 만들어 놓으면 뭔가 중화된 느낌이 들어요. 쇠라도 생명을 품으면 인상이 금세 부드러워지죠. 저 자신도 자연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 주변에 더욱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종종 마을의 할머니들은 부러진 낫이나 맷돌을 들고 와 그에게 내놓는다. 연장을 두드리는 순간, 그의 예술은 일상으로 번지고 할머니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유목민, 그리고 바퀴 달린 그의 공장
흔히 주택에 적용되는 철제 장식은 발코니나 방범창, 난간 등이다. 이들은 집 안팎에 포인트를 주어 간결하면서도 앤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 씨는 무리한 철장식은 오히려 공간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철디자인은 약간의 장식 효과만으로 제 역할을 다합니다. 옛날 가구들을 보세요. 나무로 짠 장에 장식은 경첩과 자물쇠 뿐입니다. 쇠는 무게도 많이 나가기 때문에 자칫 많이 사용하면 가구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죠. 욕심내지 않는 것이 본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비결입니다.”
쇠를 만지는 사람이지만, 결코 쇠를 주인공 삼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손기술이 폄하되는 대량생산시대에, 그의 고군분투는 이러한 겸손함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언젠가 손수 작업실을 짓고 싶어요. 저같은 사람이 늘 갖은 꿈이지요. 그러나 이 일을 하면서 정착할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거에요.”
주변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화성이기에 그에게도 언젠가 떠날 순간이 올 것이다.
공장 안 모든 기물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다.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 그의 공장이, 유목민 같은 그의 삶과 일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마을의 바람개비같이 그에게도 이정표는 있을 것이다. 무형의 철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일, 그 보람을 찾아 그는 오늘도 공장 한켠에 앉아 쇠망치를 두드리고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철로 만들어진 강아지에 손을 대니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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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마을 할머니들은 망가진 호미를 들고 그를 찾아온다. 그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아슬아슬 즐기고 있는 대장장이다.
바로 얼마전, 3월 11일 인사동에서 그의 전시가 끝났다. 폭격기를 닮은 삽, 돼지코가 있는 우체통, 주정뱅이를 끌어내는 처치기 등 상상력을 다시 한번 끌어내 선보인 전시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심하게 수척해있었다.
"공장에서 쇠 만지는 것보다, 갤러리에 가만 앉아있는 게 백배는 더 힘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이 빠져서...."
그는 천상 대장장이였다..